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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 발자취/살리는 말

<살리는 말> 이천식천



윤선주 한살림연합 이사

 

이천식천(以天食天)은 “한울이 한울을 먹는다”는 뜻으로, 동학의 2대 교조 해월 최시형 선생의 말입니다. 동학에서는 모든 만물이 한울님을 자기 안에 모시고 있는 거룩한 존재라 여깁니다.

동물 뿐 아니라 들판의 작은 풀씨 하나도 자신이 싹을 틔울 적당한 시간을 고를 줄 알고 햇빛을 더 많이 받기 위해 몸을 비틀고 씨앗을 많이 퍼뜨리기 위해 머리를 씁니다. 움직일 수는 없지만 그렇게 해서 자신들의 영토를 넓혀 나가는 것은 들꽃의 군락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기쁨과 슬픔, 심지어 분노와 공포도 느낄 수 있겠지요. 《식물의 사생활》을 비롯한 여러 가지 책이나 연구 논문을 보면 식물에게 감정이 있다는 점이 현대과학으로도 증명되었는데 실제 아프리카의 어떤 원시 부족은 공동체가 나무 둘레에 손잡고 서서 저주하는 것만으로도 큰 나무를 쓰러뜨려 필요한 곳에 쓴다지요?

동학에서는 생물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물건, 사물과 무생물조차 살아있으며 한울님을 모신 거룩한 존재라고 합니다. 이 또한 증명된 사실인데요, 《물은 답을 알고 있다》 라는 책에서는 같은 물도 감사의 말을 들었을 때와 분노와 저주의 말을 들었을 때 분자구조가 다르게 변하는 것을 사진을 통해 보여주었습니다. 물이 살아서 반응하고 교감하는 존재라는 것이지요. 우리 주위에는 유난히 꽃을 잘 가꾸는 사람, 남이 시들었다고 버린 화분을 주워 가 건강하게 키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남들은 5년, 길어야 10년 정도 타는 자동차를 20~30년 거뜬히 타는 사람도 있고 잘 깨지는 그릇을 몇 십 년이나 알뜰하게 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특징은 사물에 대해서도 오랜 시간 공을 들이고 마치 사람에게 하듯 아끼고 자랑스러워하며 말을 걸거나 쓰다듬기도 하는데, 조금 과장하면 둘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입니다.

채식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육식을 동물의 분노를 먹는 행위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과학의 성과를 받아들인다면 채식 또한 식물의 분노를 먹는 셈이지요.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해월 선생의 이천식천이라는 말은 모든 만물이 한울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물은 한울이 한울을 먹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먹는 일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먹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한울이 한울을 먹는다는 것은 나를 먹고 살게 해서 키운 세상, 천지만물, 천지부모의 은혜를 생각하며 어떻게 하면 되갚을 수 있을까(반포지교反哺之敎)를 되새기고 실천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진화론에서 주장하는 약육강식의 논리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의 거룩한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밥상을 받으면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내 안으로 모셔오는 일이 되겠지요. 천지만물의 기운을 내 안으로 모셔 내가 살고 그 은혜를 돌려주기 위해 매 순간 힘을 기울이는 삶이야말로 내 안에 한울님을 모시고 사는 일이 아닐까요? 동학 이전에는 세계사상사에서 이런 예리한 통찰은 없었습니다. 생태주의에서도 물질순환 이야기는 하고 있지만 순환의 완성, 내지는 영적(靈的)차원에 대해서는 언급한 바가 없습니다. 동학사상이 세계사상사적 의미를 갖는 것도 이 이천식천의 영적 각성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글을 쓴 윤선주 님은 도시살이가 농촌과 생명의 끈으로 이어져 있다는 믿음으로 초창기부터 한살림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지금은 한살림연합 이사로 일하며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이웃들과 나누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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