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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지에서 온 소식/살리는 이

혼이 담긴 감자


글|이명구 성남용인한살림 실무자

부부와 가족이 다 뛰어들어도 힘이 모자라는 농사를 권선분 생산자(50)는 여자 혼자서 짓는다. 감자, 잡곡, 벼, 메주콩, 호박 등 7,000평의 논밭 농사를 짓고 소도 열댓 마리 키운다. 해 뜨기 전 논에 나가 해질녁에 집으로 돌아온다. 오후에 1시간 정도 잠깐 눈 붙이는 시간을 빼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정신이 없다. 그래도 일손이 모자랄 때가 많다.


가뜩이나 바쁜 농사가 더 바빠진 건 2007년 가을 남편 김근호 생산자를 곁에서 떠나보내면서부터. 그때가 지금껏 농사를 지어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홀로 된 슬픔을 다 추스르기도 전에 논을 파종할 시기는 닥쳐왔다. 그 다음해는 유난히도 일이 손에 안 잡혔다. 논은 나락보다 피가 더 많아 피 바다였다. 논밭에 나가지 않고 그냥 하루 종일 멍하니 축사에 앉아 소밥만 주고 있을 때도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밭에서 잡초가 빨리 자기를 뽑아 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하면 30년 가까이 해온 한살림 농사를 더 이상 못하겠구나 싶었다.


마음을 다 잡고 다시 논밭에 들어갔지만 농사는 쉽지 않았다. 혼자인 게 얼마나 버거웠던지 ‘그냥 한살림 농사 포기하고 농약 칠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외로운 삶에, 힘 딸리는 농사가 그래도 가능했던 것은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공근공동체 생산자 동료들은 “지금까지 고생고생해서 유기농을 해 왔는데 이제 와서 어떻게 약을 쳐요” 하며 만류했고, 밭에 고랑을 내는 일 등을 도우며 일손을 보태주었다. 정말 손이 모자랄 때는 사회봉사 명령을 받은 아저씨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밭농사를 망쳤을 때, 한살림 소비자 조합원들이 모아준 성금도 액수는 크지 않았지만 그에게 큰 힘이 되었다. 사람 사는 일이 혼자 사는 게 아니듯, 농사도 혼자 하는 게 아니었다.


어려운 사람 마음은 어려운 사람이 안다고 도움 받았던 경험 때문인가. 권선분 생산자는 2010년 초에 열린 강원도 여성생산자협의회 연수에서 한 사람이 한 달에 천 원씩 모아서 불우이웃을 돕자고 제안했다. 그때 그는 “한살림을 하면서 내가 농사한 것만 팔아먹으려고 하면 안 된다. 한살림 농사는 생명 농사 아니냐. 그냥 먹을거리만 생산하는 걸 넘어서 나보다 더 어려운 곳도 도와야 한다”고 생산자들을 설득했다. '유기 농사 잘 지어 환경 살리자'는 연수 자리에서 생산자들은 다른 사람들도 살리자는 마음으로 십시일반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해 겨울까지 강원도 여성 생산자들은 100만 원이 조금 넘는 돈을 모아서 파키스탄 수해 피해자들을 돕는 데 보냈다. 2010년 한해 이상기후로 막심한 손해를 입은 생산자들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할 때 결코 작은 돈이 아니었다.


그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더불어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 자신이 한살림 농사를 특히 좋아하는 이유라고 했다. 생산자가 힘들 때 소비자가 돕고, 생산자는 자신보다 더 어려운 곳을 돕는 게 무척이나 뿌듯하단다. 금액이 크건 적건 따뜻한 마음을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거라면서.

 

건강한 먹을거리를 생산해 사람들이 건강해져서 좋고, 함께 서로 도울 수 있어 한살림이 좋다는 그에게 어떤 마음으로 한살림 농사를 짓는지 궁금해 물었다. 그는 “농사는 내 전부에요. 내 전부를 바쳐서 농사를 지었기 때문이죠”라고 답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자기 혼이 담긴 농사란다. 그는 감자밭에서 풀을 매다가 소박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살고 주위가 살고 소비자도 같이 살고 온 자연도 더불어 살고 그런 거죠.” 모든 생명을 살리는, 그의 혼이 알알이 담긴 감자가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