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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지에서 온 소식/살리는 이

<살리는 이- 최덕순 생산자> 대를 이은 가보 단감



대를 이은 가보家寶 단감
전남 담양군 시목마을 최덕순 생산자 이야기



글|최은희․한살림정읍전주 조합원



전남 담양군 금산면 시목마을.

이름 그대로 감나무가 많은 마을은 산속에 새집처럼 동그랗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전국 최초 유기농 생태마을로 지정된 이 산골마을 꼭대기 1만 2천평의 밭에서 최덕순 생산자는 단감과 매실 농사를 짓고 있지요.



년이 넘은 소나무가 몇 그루 운치 있게 자라는 마당과 자그마한 집을 제외하면 빙 둘러 사방이 감나무 밭 천지입니다. 8월의 감나무에는 싱싱한 초록의 감잎 아래 도리납작한 단감들이 풋풋하게 매달려 있습니다. 이곳의 감나무는 햇님 달님에서 나오는 호랑이가 도끼로 찍어가며 오르던 까마득한 꼭대기가 없어요. 나주 배나무처럼 가지가 밑으로 낭창히 휘어져 팔을 뻗으면 감이 쉽게 손에 닿아 신기합니다. 감나무들은 야트막한 언덕의 굴곡을 따라 끝없이 이어져있는데 이 감밭을 올해 예순 여섯의 최순덕 생산자는 밤낮으로 스쿠터를 타고 누빈답니다.

남편과 사별한지 17년. 남에게 보증을 서 주었다가 부도를 맞고 도청 공무원도 그만둔 남편은 홧병으로 눈까지 어두워져 1년 밖에 더 살지 못할거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마지막으로 시아버지 묫자리로 샀던 이 골짜기로 들어왔습니다. 시어머니와 졸망졸망 어린 아이 넷을 데리고 어쩔 수 없이 따라 들어온 것이 삼십년 전. 여기로 들어와서 대추나무를 심었다가 비 피해로 죽어 다 뽑아내고 사과나무, 배나무를 심었다가 파내고 감나무를 심으며 남편은 몇 년을 땅과 함께 살다 곁을 떠났습니다.


남편이 저 세상 사람 되었을 적에 동네 사람들은 나보고 저 부지런한 사람이 여그서 감나무나 붙들고 살 수 없을 거라고 했거든. 젊었을 적에 남편 번듯하게 공무원 할 때도 일이 하고 싶어 땅장사, 집장사, 식당일, 청소부일... 오만가지 안해본 일이 없었으니 뭘 해도 못하랴 싶었지만 근디 농사짓고 살다 보니 밖으로 나가 장사하며 허덕거리며 살고 싶지가 않더만.


그때 우리 동네 감나무 작목반이 13명이었는디 나만 혼자 여자로 들어간거지. 어느 날 그러대. 우리가 감나무를 친환경으로 재배하자. 농약 안치고, 비료 안치고 그러면 땅도 살고, 감도 좋은 값을 받을 수 있다. 그 말 듣고 밤새 생각했지. 그러고 해도 감이 남아날랑가 걱정이제. 그러다가 아~ 내가 언젠가는 이 땅을 자식에게 물려줘야 하는디 땅을 살려서 물려줘야지 싶어서 바로 다음날 가서 그랬제. 나도 한번 따라가 볼라요. 열셋이 시작을 했는디 지금 유기농으로만 하는 집은 나까지 세집이 남았어. 동네사람들이 나보고 그러대. 참말로 기어니 따라가네!


원래 유기농 안하고 일반으로 지을 때 만 이 천평 밭에서 감 900톤을 따요. 농약 안치고 농사지으니 벌레가 너무 먹어 40톤도 안나오드만. 4년간 울면서 인건비, 자제비가 다 빚으로 쌓여 가는디 동네에서는 미쳤다 미쳤다 해쌓고. 아이고~ 내가 내년에는 꼭 약 쳐분다. 결심을 허지만 봄이 오면 안되지. 내가 이 땅을 살려서 자식한테 물려줘야지 죽은 땅을 물려줘서는 안된다. 그러고 그 미친 짓을 계속 했지요. 벌레가 끓으면 감 한 개, 두 개가 아니라 근방을 다 망쳐버리니 하도 폭폭해서 밤에 이불 보따리 싸들고 애들 아버지 무덤으로 가서 벌레 잡는 법 좀 갈쳐주시오! 하며 울었제. 암만 그래도 안 갈쳐 주드만. 풀약 못하니 감나무 밭의 풀을 예취기로 다 비어야 하는디 땅은 넓제, 일은 많제 몸에 손전등 달고 밤에도 풀을 비었당게. 밤 2~3까지 터파 (땅을 파는 일)하고 그러고 사니 하루에 세, 네 시간 자고, 새벽 네 시에는 일어나야 아침밥 먹기 전에 한나절 일을 하니까.


그란디 내가 바쁘게 살아온 것이 꼭 농사일 때문만은 아니고. 전남 담양군 여성협의회 회장으로 봉사활동을 열심히 했다고 대통령상을 받았거든. 뭔 일이든 일하는 걸 좋아해서 재미있게 했을 뿐인데. 시어머니가 97세에 돌아가셨는디 마지막 3~4년은 치매에 걸려 내가 고생 좀 했는디 도지사가 효부상도 주고. 지금도 동네 어르신들이 저한테 수제비 끓였으니 내려와 묵어라! 된장 지졌응께 혼자 밥 묵지 말고 싸게 내려오라. 오늘도 말복이라 동네 사람들 모여 어르신들 식사대접하기도 했고. 우리 마을이 그런 것이 참 좋아. 그래서 노인 요양사 자격증도 땄어. 공부 별로 안 어렵드만. 사람들이랑 일하고 먹고 노는 것이 사는 거지. 마음 맞춰주면 다 좋아하지. 나는 사는 것이 그래서 재밌어요.

아들 필훈씨와 함께이기에 더욱 행복한 최덕순 생산자



광주서 은행 다니고 있는 아들한테 “니가 아무리 벌어봤자 쓰기 바쁘고 돈도 못 모으는디 여기 감농사는 열심히만 하면 몇 배로 났다. 한살림에서는 감도 대접받고 농사짓는 사람도 대접받는다. 좋은 농사지어 사람들 먹여 살리니 얼마나 좋냐. 그러니 들어와서 동네 사람들이랑 재미지게 농사를 지어라, 내가 니 물려줄라고 이렇게 땅을 가꿔놨는디 인자 나는 늙어 힘이 없다. 니 아니면 누가 허것냐” 해서 지금은 들어와서 소도 40마리 키우고, 그 소 거름으로 감나무를 키우니 감도 좋고. 나도 아무 걱정 없지라.



시목마을은 무항생제 축산마을로 지정되어 친환경 방법으로 소를 기릅니다. 소는 농약 안친 감나무 그늘에서 자라는 풀을 먹습니다. 그 소의 똥은 거름이 되어 감나무를 살리고 그 나무에서 열린 감을 사람들은 맛있게 먹고……. 이 아름답고 놀라운 순환의 한가운데 예순이 넘어서도 호랑이 등에 올라탄 장수와 같은 최덕순 생산자가 있습니다.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자식 농사짓는 꼴 못 본다고 논 팔고 소 팔아 공부 가르쳐 자식들 도시에서 사는 걸 출세라고 생각하는 시절에 자식에게 살아있는 땅을 물려주겠다는 꿈을 품은 어머니. 햇볕에 탄 가무잡잡한 얼굴. 이 놀라운 농부의 얼굴에는 신기하게도 혼자서 농사짓는 여인네로 살아온 삶의 그늘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농사를 자식에게 물려줄 자랑스러운 가업으로 바꾼 강단진 품위가 서려있습니다. 부모가 살려놓은 땅에서 다음 세대는 더 멋지게 농사짓고 살 것이라는 짱짱한 낙관 속에 농장의 감들은 8월의 햇빛을 흠뻑 삼키며 단물이 고여 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