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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 발자취/자연에서 온 귀한 것

제주도의 사계절이 키운 선물, 겨울당근

 

 

제주도의 사계절이 함께 키운 겨울 선물, 한살림 겨울당근

 

·사진 박근모 편집부

 

한겨울 칼바람이 분다. 시리도록 춥다. 하지만 겨울이라 더 맛있는 뿌리채소가 있다. 멀리 바다 건너 제주도에서 온 당근이 그렇다. 제주도에서 자란 겨울 당근은 한여름에 파종을 한다. 가장 무더울 때 힘겹게 어린 싹을 틔우고 자라나 겨울 찬바람 속에서 뿌리를 키운다. 거친 자연을 견뎌내면 주홍색 당근은비로소 달곰한 수분을 품는다.


화산재가 만든 최적의 땅

한살림의 당근 산지는 강원도 양구에서 제주도까지 전국 여러 곳에 있지만 겨울 당근은 제주도에서만 생산된다. 제주도는 우리나라 당근 생산의 70%를 담당하고 있는 주산지다. 제주도가 당근을 위한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제주도에서도 특히 구좌읍 등 동부 지역은 화산재가 입자가 가벼운 다공질의 까만 화산회토로 변한 곳이다. 이 흙은 물빠짐이 좋으면서도 수분을 많이 품을 수 있어 뿌리채소 재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제주도에서는 이를 ‘뜬땅’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가 본 제주도 당근밭의 흙은 마치 찐 감자처럼 포슬포슬한 감촉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뜬땅’이 분포해 있는 섬의 동북부지역에서는 당근, 무, 감자 등이 많이 재배되고 있다. 이런 흙은 뿌리를 품어주면서 곧게 자라도록 도와준다. 당근밭이 폭신폭신하기때문에 당근을 손으로 당기면 쑥쑥 뽑을 수 있을 정도이다.


모진 겨울바람이 준 달곰한 맛

누가 제주도를 따뜻한 남녘이라 하였는가? 제주도는 바람의 섬이다. 수은주는 뭍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을지 몰라도 체감온도는 서울과 다를 게 없다. 오히려 거친 바람이 뼛속까지 스며들어 사람도 작물도 이를 고스란히 견뎌야 한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가까스로 싹을 틔운 당근은 모진 겨울바람 속에서 땅속 뿌리를 불려간다. 그렇게 4개월 동안 가혹한 자연을 견디며 당근은 살아남기 위해 몸 안에 당분을 축적하며 몸피를 키운다. 이런 과정을 견딘 후 12월말이 되면 비로소 수확을 하게 된다. 단맛과 수분이 뛰어난 제주도 당근이 각별한 사연이 이렇다. 당근을 수확하고 난 뒤 2월말이면 헤어리베치 등 녹비작물을 심는다. 갈아엎으면 밭에 유기질 거름이 되고, 자라는 동안은 잡초도 막아주는 일석이조 고마운 작물이다. 6월이 되면 녹비작물을 갈아엎어 땅심을 키운다. 그리고 8월 초순 파종을 하고 난 뒤부터는 일일이 손으로 잡초를 뽑고, 농가에서 만든 액비를 뿌려준다. 이 모든 작업을 관행농가에서는 제초제와 농약, 화학비료로 대신한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① 제주 당근은 단맛과 수분이 많아 특히 맛이 좋다.
② 혼디드렁 공동체 공동 집하장 ③ 물빠짐이 좋은 화산회토는 당근을 키우기에 적합하다.


제주도 농부를 살려준 고마운 작물

사실 당근이 제주도에서 자라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제주도 동북부 지역은 토양특성 때문에 뿌리채소에는 어울릴지 몰라도 다른 작물은 잘 자라지 않는 척박한 땅이었다. 예전에는 주로 유채와 참깨를 심었는데 수확이 보잘 것 없어 대개의 농가가 형편이 어렵다보니 해녀들의 물질이 아니면 생계를 이어가기가 힘겨웠다고 한다. 1970년대부터 당근농사가 시작된 뒤로 사정은 달라졌다. 가장 척박한 토양에서 가장 맛있는 당근이 탄생한 것이다. 주민들의 형편도 나아졌다. 이 지역 농부들에게는 당근은 단순한 농작물이 아니라 ‘살 길을 열어준 고마운 존재’라고 한다.

3년 전부터 제주도 생산자들의 시름이 깊어졌다. 당근을 파종할 때면 가뭄이 오고, 기온이 비정상적으로 올라갔다. 폭염에 떡잎이 말라죽는 일이 잦았다. 어렵게 잎을 틔워도 왕귀뚜라미 같은 해충들이 모조리 갉아먹는 일도 흔했다. 한살림 생산자들은 속이 타들어 가도 ‘자연의 섭리려니’,‘벌레도 먹고 살아야지’ 할 뿐 살충제를 뿌려댈 수는 없었다. 이웃 농부들은 혀를 찼다. 참다못해 당근밭가 돌담을 불로 지져대 왕귀뚜라미를 잡기도 하지만 역부족인 건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한 번에 끝나는 파종이 두 번 세 번 되풀이 되는 일이 되풀이됐다. 8월 15일 이전에 끝내던 파종이 8월말까지도 이어진다. 시간도 비용도 몇 배 더 드는 것은 물론이다.

이런 사정이다보니 제주도 당근 값이 많이 올랐다. 2013년의 경우 관행 제주당근 10kg 1박스 가격이 9만 원대까지 치솟았다. 그런데 유기농 한살림 당근은 4만 원대다. 농부들은 어쩔 수 없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야했다. 그러나 소비자들과의 약속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이들이 키운 당근은 파종 전에 작목회의에서 정한 가격대로 꾸준히 공급됐다. 한살림 당근에는 이렇게 추운 겨울바람만 깃든 게 아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 서로의 생명과 신뢰를 지키겠다는 자존심과 전국 최고의 당근을 생산한다는 자부심이 단단히 박혀있다.


가족들이 먹는다는 생각으로 정성 다해

한살림 겨울 당근은 생산자들이 직접 소포장까지 해서 내고 있다. 당근을 수확하면서 1차적으로 선별하고, 소포장을 할 때 다시 한 번 크기와 무게, 상태를 살펴 낼만한 것들인지 골라낸다. 내 가족이 먹을 것을 고르듯 정성을 다한다. 그것이 한살림농부의 품격을 지키는 일이라고 이들은 믿고 있다. 품위가 다소 떨어지는 당근들은 골라내 가공용으로 보낸다.

한살림 겨울 당근의 대표적인 생산지인 구좌읍 평대리 혼디드렁 생산자공동체는 2009년 이 마을 다섯 농가가 지역주민들과 함께 생명이 살아 있는 농업을 실천하기 위해 결성했다. 혼디드렁은 ‘함께 한다’는 뜻의 제주도말이다. 공동체 대표인 고홍기 생산자는 이웃들과 함께 힘을 합쳐 마을을 꾸려가고, 평대리에서 유기농업을 늘려가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다. 공동체 어르신들이 농사짓는 모습을 보면 그 밭에 서슴없이 들어가 직접 손으로 잡초를 뽑고, 벌레도 함께 잡는다. 혼디드렁 농부들이 관행농에 비해 조금도 축나지 않게 농사를 잘 꾸려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게 그의 바람이다.

제주도 당근밭에는 여기저기 작은 발자국들 눈에 뜨인다. 마치 첫눈 내린 소복한 들판이라 발을 들여놓기도 미안한 당근밭에 노루가 지나가면 고스란히 발자국이 남는다. 제주도에는 사람들만 모여사는 게 아니다. 선명한 발자국을 남긴 노루처럼 뭇 생명이 어울려 산다. 한살림 겨울 당근도 정직한 농부의 손길과 땀방울뿐 아니라 제주도 섬 전체가 숨결을 보태 함께 키웠다.

단순히 ‘맛있다’라고만 표현하기가 미안할 지경이다. 안전하고, 강인하고 신선함이 오래가고, 오래 보관해도 잘 상하지 않는 이 특별한 당근. 여린 잎이 땅위로 머리를 내밀 때부터 수확을 할 때까지 유혹을 견디며 화학비료 한 번 주지 않았기에 더욱 각별한 물품이 되었다. 겨울당근은 수확기인 1월이 제철이다. 이후로는 냉장보관했다가 5월까지 내고 있다. 제주도의 자연이 통째 들어 있는 뿌리채소 당근. 오늘 저녁식탁에 올리면 제주를 느낄 수 있다.

 

한살림 당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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