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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살림 물품 써보니 어때요?/독자가 쓰는 사연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 수기/ 공모 당선작] 말없는 밥상


말없는 밥상

유수진

 
대학 시절을 되돌아보면, 방학은 언제나 부모님의 공장에서 일을 도와드렸던 기억들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고3이 되던 해 아버지는 부도가 났고 저는 고등학교 입학할 때 부었던 적금이 있어서 그나마 입학금은 마련할 수 있었죠.
아버지가 하시던 공장은 월급을 줄 수가 없어서 일하시던 분들이 다들 떠나갔고, 저와 어머니와 아버지만이 일을 해야 했어요. 한창 선배들과 놀고 싶고, 과 동기들과도 놀고 싶을 나이에 제 고민은 어떻게 하면 꾀를 부려 공장 일을 안 할 수 있을 까였죠. 그때는 과외를 하면 과외비는 식구들의 생활비로 들어갔고 그나마 학비 부담을 줄일 수 있는 저의 가장 큰 노력은 장학금 타기였어요. 친구들 사이에서는 공부만 하는 악바리, 놀 줄 모르는 범생이, 5시면 집에 가는 고등학생으로 통했죠. 신입생 오티도 못 가봤고, 엠티도 못 가봤어요. 그러다 하루는 동아리 친구들과 함께 생일이 비슷한 날인 친구들을 모아 같은 날 생일파티를 해주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1박 2일로 여행을 가자는 이야기가 오고갔죠. 저를 포함한 세 명의 친구들이 같은 달 비슷한 시기에 생일이 있었거든요. 다른 건 몰라도 그건 꼭 친구들과 하고 싶어서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는데 아버지께서 어렵게 수주해온 거래처의 물량을 대기 위해서는 하루하루가 빠듯하다며 안 되겠다고, 미안하다고 하셨죠. 속상하기도 하고 내가 정말 친딸이 맞을까 하는 어린애 같은 생각까지 하며 사흘을 부모님과 한마디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생일인지도 모르고 아침을 맞이했는데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학교에 가겠다고 나서는 제게 어머님이 다가오셨어요. "아침이라도 먹고 가." 하셨는데 아침을 먹지도 않던 저인데, 새삼스럽다 싶으면서도 시위라도 하듯 한마디 대답도 안 하고 뚱하니 서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제 손을 잡으셨고 저는 이런 저런 실랑이를 한답시고 말을 하는 것조차 싫어서 그냥 그대로 따라 들어갔습니다.
부엌에는 기름장도 소금도 없이, 이제 막 구운 김 여러 장과 이제 갓 지은 고슬고슬한 밥 한그릇이 놓여 있었죠. 제 손을 잡아끌어 앉히시고는 어머님도 말없이 김 한 장을 손바닥에 놓으시더니 갓 지은 밥 한 숟갈을 그 김에 싸셨습니다. 그렇게 한 입 크기로 싼 밥을 제 앞에 놓인 작은 접시에 하나하나 놓으셨습니다.
"이제 막 지어서 맛있다. 갓 구운 생 김 너 좋아하잖아." 한 개를 먹고 두 개를 먹고... 어머니는 세 개 이상은 놓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다 먹을 때 까지 기다렸다가 싸서 놔주시고 하셨어요. 김에 싸서 오래 두면 김이 눅눅해 져서 맛이 없다는 게 이유셨죠. 대 여섯 개를 말  없이 집어 먹고 있는데... "생일인데 미역국은커녕 맛있는 반찬도 하나 제대로 못 해줘서 엄마가 미안해. 너 고 2때도, 고 3때도 엄마가 옆에 있어주지 못했는데 이제는 옆에 있으면서도 생일상 한 번 못 차려주네"담담하게 하시는 말씀이셨는데 철없게도 서러움이 밀려왔어요. '그래 엄마는 오빠의 생일상은 늘 챙겨주면서도 내 것은 안 해주셨지. 지금도 오빠의 생일이었으면 이러셨을까?' 뭐 그런 얼토당토않은 생각까지 하면서 먹기를 그만 두고 여전히 말 한마디 하지 않은 채 일어서서 집을 나섰는데 그제야 눈물이 뚝뚝. 어머니가 밉기도 하고 생일상을 생김 싼 밥으로 먹은 게 억울하기도 하고 뭐 그만한 일로 자식에게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나 약한 모습 보이시는 게 싫기도 하고 집이 가난해진 것이 화가 나기도 하고 참 여러 가지 마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어머니의 그 담담한 말투가 얼마나 많은 눈물을 삼키고 하신 것이었는지 되돌아보게 되요. 그리고 힘이 들 때마다 어머니의 그 밥이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불에서 갓 구워낸 김이 눅눅해지기 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한 숟갈씩 싸서 주셨던 그 김밥, 어쩌면 소고기를 넣은 미역국 보다, 목이버섯을 넣은 잡채 보다, 밤을 넣은 갈비 보다 훨씬 정성이 들어간 생일 밥상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잊을 수 없는 밥 한그릇] 덕분에 그때 일을 한 번 더 떠올려 보네요. 감사드립니다. 
 

*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 수기는 네이버 테마캐스트를 통해 8주간 동안 이어진 한살림의 밥 이야기 연재를 마치
며, 밥에 얽힌 네티즌들의 소중한 추억과 사연을 찾기 위해 마련되었습니다. 이번에 실린 수기는 장원을 받은 당선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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