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아이가 태어나고, 삶의 전환점을 맞았다. 아이와 함께 어디서 어떻게 어떤 먹을거리로 살아갈까에 대해 더 구체적인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분명 자원은 한정되어 있는데 지금처럼 물건과 음식이 넘쳐나는 풍족한 삶은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같이 교사로 일하던 남편은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둘 다 사직서를 내고 남편은 친환경 농사, 나는 자식농사를 짓기로 했다. 지금 합
천 가회에 들어와 7년째 겨울을 맞고 있다.
요즘 세상에 부부교사 직업을 그만두고 농사를 짓는다 하면 십중팔구 특이한 사람 취급을 한다. 그러나 학교를 그만두고 ‘살림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이유는 학교에서 만난 많은 아이들 때문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에 대해 알고 싶으면 그 사람이 무엇을 먹는지를 지켜보라는 말이 있다. 한 사람의 성정을 먹을거리로만 판단하는 것이 무리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개인적인 경험에 의하면 영 틀린 말은 아니다. 폭력적이고 산만한 아이들, 공감할 줄 모르고 자제력이 없는 아이들이 가진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육류나 튀김, 인스턴트 음식을 유난히 좋아한다. 인스턴트 음식을 먹는다고 아이들이 다 문제성이 있는 건 아니지만 폭력성을 띤 아이들의 대부분은 육류나 탄산음료 등 건강하다고 볼 수 없는 음식을 늘 가까이에 두고 있었다.

그즈음 해서 손에 쥐게 된 책에서도 큰 영향을 받았다. 식원성 증후군(Food Oriented Syndrome)이라 하여 음식이 원인이 되어 나타나는 행동양식에 관한 책이다. 일본은 오래전부터 음식을 청소년들의 사회적 범죄 연구 및 해결에 응용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 집 반찬은 많아야 3찬을 넘지 않는다. 반찬 가짓수가 많으면 오히려 음식 고유의 맛을 잘 못 느낀다. 봄이면 돌나물의 아삭함과 냉이, 두릅의 향을 느끼며 먹고, 여름이면 햇살에 맛있게 익은 토마토와 오이를 먹는다. 초가을에는 둥근 애호박을 지져 먹고, 볶아 먹고, 된장국에 넣고, 전도 부쳐 먹는다. 겨울에는 잘 갈무리 해 놓은 배추와 무가 밥상에 자주 올라오고, 봄에 말려놓은 묵나물이 기본 찬이 된
다. 매일 먹어도 아이들은 늘 맛있다 한다. 그만큼 아이들은 제철 채소의 ‘맛’을 안다. 이럴 때야말로 살림하는 보람을 느낀다.
나는 ‘여성농부’이자 ‘살림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정말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건강한 먹을거리가 있어야 아이들이 살아나고,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도 살아난다고 믿는다. 내 아이뿐 아니라 내 이웃의 아이도 함께 건강해야 한다. 그래야만 사회도 건강해질 수 있다. 우리 농업을 지키자고 주장하다가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사경을 헤매고 계신 백남기 어르신도, 내 땅에 송전탑 대신 농사를 짓고 싶다 하시는 밀양의 할매들도, 우리의 이웃으로 함께 손잡고 나아가야 할 분들이다.
한살림 조합원들은 단지 ‘보신족’이 아니라, 이 사회의 건강을 책임지는 온 나라 살림의 주체이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이 한살림 조합원임이 너무너무 자랑스럽다. 왜냐하면 ‘살림’은 생명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글을 쓴 임진희 님은 세 아이의 ‘엄마’임에 감사하고 ‘살림하는 사람’임을 행복해하면서 합천에서 친환경 농사를 짓고 있다. 여름 내 아이들이 계곡에서 물놀이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을 농사의 어려움과 바꾸려는 미련한 삶을 행복으로 알고 살고 있다. 한살림과의 인연을 늘 소중하게 생각하는 조합원이자 여성농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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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김장 준비를 마쳤다. 마늘과 파, 갓, 무는 과수원에 딸린 텃밭에서 나왔고 고추는 이웃들이 조금씩 나누어준 것만 해도 남을 정도였다. 새우젓과 양파 정도만 오일장에서 사왔다. 올해 처음으로 실패한 게 어이없게도 배추다.
해마다 별 신경 쓰지 않아도 실하게 포기를 안던 배추 농사를 초장부터 망쳤던 것이다. 말복 지나 배추 모종을 구해 심어놓고 과수원 일에 매달리느라 눈길을 주지 않았더니 어느 틈에 벌레가 창궐하여 속대만 남기고 모두 뜯어먹은 게 아닌가. 백 포기 넘게 심은 게 겨우 스무 포기 정도 남았을까, 그나마 속이 차지 않아 진즉에 겉절이로, 된장국으로 사라진 바 되었다. 다행히 마을에는 유기농으로 배추농사를 짓는 집이 있어 그 집에서 오십 포기를 사왔다. 그렇지 않아도 싼데 이웃이라고 거의 거저나 다름없이 얻었다.
이렇게 일찍 김장을 하게 된 것은 오직 하나 김치냉장고 덕이다. 예전에는 대설 무렵이나 되어야 김장을 했었다. 기껏해야 땅에 묻거나 광에 보관했으니까 일찍 맛이 들면 이른 봄에 벌써 군내를 풍기게 마련이었다. 뽑아놓은 배추를 짚으로 덮어두고 살얼음이 얼고 눈발이 날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김장을 담갔다. 우리도 서울 사는 아우네 시간에 맞추어 일찌감치 김장을 하게 된 것이었다.
배추를 절이고 양념 준비를 하는데 가만히 보니 이게 보통 화려한 김치가 아니다. 별 특색 없고 심심한 충청도 김치라 비린 것이라곤 겨우 새우젓 한 가지 들어가지만 고춧가루며 마늘을 버무리는 양이 엄청나다. 보통 배춧잎 사이마다 양념을 넣는 것을 당연한 듯이 여기나 수십 년 전만 해도 보통 서민들 집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우선 요즘처럼 양념류 농산물 값이 싸지 않았다. 믿기 어렵겠지만 마늘과 고추는 삼십 오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 가격 차이가 없다. 라면이 오십 원에서 열 배 이상 오른 세월 동안 말이다. 직접 농사를 짓던 우리 집에서도 지금 우리가 흔히 보는 포기김치는 손님이나 특별한 날을 위해 대여섯 포기를 따로 담그는 게 다였다. 식구들이 겨우내 먹는 김치는 절인 배추를 숭덩숭덩 썬 다음 옅은 양념 물에 대충 버무리는 거였다. 간신히 백김치를 면한 것을 항아리에 넣었다가 아침마다 한 보시기씩 꺼내오는 것을 김치 아닌 ‘짠지’라고 불렀다. 지금 생각해도 그 때의 김장은 김치보다 짠지라는 호칭이 더 어울린다.
추운 겨울날, 절인 배추를 씻을 물은 어디에 있었던가. 집집마다 리어카에 싣고 그도 없으면 지게에 지고 큰들 논배미 지나 앞개울로 갔다. 남자 어른들이 그런 일을 도와주는 것은 남우세스러운 시절이었으므로 리어카를 끌고 가는 건 내 몫이었다. 그리고 배추를 씻는 시간은 어린 시절에 가장 길고도 괴로운 순간이었다. 월악산에서 흘러내린 차디차고 맑은 물에 장화도 장갑도 없이 들어간 어머니는 빨갛게 얼었다. 가끔씩 물에서 나와 개울가에 피워놓은 불에 손을 녹이던 어머니가 ‘손발이 떨어지는 거 같다야’ 하고 웃었지만 나는 자꾸만 울음이 나오려 했다. 그리고 그예 눈물 몇 방울을 떨어뜨리곤 했다. 사
십 년 저쪽 어름, 얼굴에 버짐이 피고 어머니가 장에서 사온 ‘원기소’를 과자처럼 한 움큼씩 씹어 먹던 겨울날이었다.

 

글을 쓴 최용탁 님은 충북 충주의 농촌마을에서 태어나 월악산과 남한강 사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서른 한 살에 고향으로 돌아와 과수원을 하며 아이 셋을 키우는 동안 세상살이의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펴낸 책으로는 소설집 <미궁의 눈>, <사라진 노래>, 장편소설 <즐거운 읍내>, 산문집 <사시사철>, 평전 <계훈제>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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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힘든 일을 마치고 밥을 먹을 때 고영민 시인의 시 <공손한 손>을 떠올린다. “추운 겨울 어느 날 /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다 / 사람들이 앉아 / 밥을 기다리고 있었다 / 밥이 나오자 / 누가 먼저랄 것 없이 / 밥뚜껑 위에 한결같이 / 공손히 / 손부터 올려놓았다” 고영민, 시, <공손한 손>, 전문
또, 나는 생일이거나 기제사가 있는 특별한 날 밥을 먹을 때, 동학에서 나오는 “밥이 하늘이다”라는 말을 떠올리기도 한다. 사람의 한평생이 ‘밥’과 연관되어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숟가락을 엎어놓으면 그 형상이 무덤 같다. 생사의 거리가 이만큼 가깝고 멀다. 숟가락을 엎는 날 죽음이 마중 오리라. 밥사발을 엎어놓으면 이것 역시 그 형상이 무덤을 닮았다. 죽음이란 밥사발을 엎어놓는다는 뜻이리라.
옛말에 ‘얼굴 반찬’이라는 말이 있다. 밥은 혼자먹기보다 여럿이 둘러앉아 먹어야 맛이 있다는 말이다. 왜 안 그렇겠는가? 다른 건 몰라도 밥만큼은 여럿이 둘러앉아 흥성흥성 즐기는 것이 제격이요, 제맛이다. 혼자 먹는 밥처럼 청승맞은 일도 없다. 예전의 밥상들은 대개가 두레 밥상인 게 많았다. 둘러앉아 먹으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요즘 들은 사각인 밥상이 더 흔하다. 둘러앉고 싶어도 앉을 수가 없다.
‘밥은 하늘이다’라는 말처럼 ‘밥’은 신성한 것임이 분명하지만 밥을 얻는 과정은 저마다 다르다. 신성한 뜻을 지닌 ‘밥’을 얻기 위해 성실, 근면, 정직하게 밥을 구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에 자기 자신과 이웃을 속이고 심지어 타자에게 눈물과 고통을 안기거나 떠넘긴 대가로 구차하고 비굴하게 구하는 밥도 있다. 밥에도 값과 격이 있듯이 밥에 이르는 과정에도 값과 격이 있는 것이다. 한평생을 살면서 먹는 밥인데 기왕이면 밥 앞에 부끄러운 얼굴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가축이 사료를 삼키듯, 기계가 연료를 채우듯 밥을 취한다면 그는 밥 앞에 죄를 짓는 자이리라. 밥을 구하는 과정에 부끄러움이 적어야 밥의 격과 값이 빛날 수 있다.
밥은 그동안 내게 이러저러하게 삶에 대한 사유를 안겨다 주었다. 밥은 내 생활의 신앙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처럼 귀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는 ‘밥’이 최근 들어 모욕과 수난을 겪고 있어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정부가 밥쌀용 쌀을 수입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나랏일을 하는 분들은 곧잘 효용성을 들먹일 때가 많다. 이때 동원하는 논리가 비교우위론이다. 가령 비싼 공산품을 내다 팔고 값싼 농산품은 외국에서 사다 먹는 게 유리하다는 논지가 그것인데 이것은 매우 위험한 논리다. 농산품은 상황 변화에 따라 생활의 무기가 될 수 있다. 오늘은 싼값에 거래되다가도 내일 가서 열 배 스무 배 천정부지로 값이 뛰어오를 수 있는 게 외국의 농산물이다. 손해만 보아온 농사꾼이 농사를 저버린 상태에서 예의 우려가 무서운 현실로 닥쳐온다면 미래의 국민이 그 손해를 고스란히 감당해야만 하는 것이다. 농사는 모든 산업의 토대라 할 수 있다. 당장 효용성만을 고집하여 나라 살림의 근간을 흔들고 있는 그들로 인해 우리의 미래가 암담해지는 일이 없도록 미연에 이를 막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개인의 일이 아니라 나라 전체의 일이기 때문이다.

 

글을 쓴 이재무 시인은 1983년 무크지 <삶의 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길 위의 식사>,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 등의 시집을 펴냈으며, 현재 대학에서 시창작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주식회사 <천년의 시작>의 대표 이사로 계간지 <시작>을 통해 시와 대중을 잇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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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마을 들녘에 벼가 익어가고 있습니다. 다음 달이면 맛있는 햅쌀이 밥상에 오를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왜냐고요? 우리나라는 세계 7∼8위권의 무역 규모와 세계 13~14위권의 국민총생산 규모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국민이 느끼는 삶의 만족도는 세계 최하위권에 있습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2015년 5월 17일 내놓은 ‘2015년 신입사원 채용실태’를 보면, 대졸자들의 취업 경쟁률이 평균 32.3대 1에 이른다고 합니다. 100명이 지원했을 때 3명만이 뽑혔다는 얘기입니다.

더구나 ‘2014년 농고·농대 졸업생 진학 현황’에 따르면 농고 졸업생 100명 가운데 1명, 농대 졸업생 가운데 7명만이 졸업한 뒤에 영농에 종사한다고 합니다. 이런 현실이니 어찌 들녘에 벼가 익어간다고 마냥 마음이 편할 수 있겠습니까? 앞으로 나라를 이끌어 갈 젊은이들이 ‘생명 창고’인 농촌을 버리고 온통 도시에 몰려 경쟁에 지쳐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사람의 길’을 찾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살고 있는데, 무슨 보람과 기쁨으로 햅쌀이 목으로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그 젊은이들은 모두 우리 아들딸이기 때문입니다. 언제쯤 이런 세상이 올까요? 젊은이들이 생명을 키우는 흙과 물과 바람과 햇볕과 별빛이 쏟아지는 농촌 들녘에서 웃고 노래하며 농사지을 수 있는 날이 오긴 올까요?

 

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


서정홍


밥 한 숟가락
목으로 넘기지 못하고
사흘 밤낮을
꼼짝 못하고 끙끙 앓고는
그제야 알았습니다
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
여태
살아왔다는 것을

 

저는 황매산 기슭 작은 산골 마을에서 농사지으며 틈틈이 시를 쓰고 있습니다. 58년 개띠인 제 나이는 올해 58세입니다. 이 나이에 11년째 우리 마을에서 ‘청년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아래는 2015년 9월 현재, 우리 마을 청년회원들 명단입니다.
장대 아지매(75세), 방아실 아지매(75세), 하동 아지매(75세), 하동 어르신(79세), 덕춘 아지매(74세), 이경식(56세), 우동 아지매(73세), 우동 어르신(71세), 한동 아지매(63세), 한동 어르신(67세), 서울 아지매(69세), 현동 아지매(81세), 현동 어르신(85세), 설매실 아지매(74세), 조영래(54세), 마산댁(56세, 아내), 그리고 나(58세)와 지난해 귀농한 노총각 이인화(49세)를 합쳐서 모두 18명입니다. 평균 나이가 69세입니다.
제가 이 마을에 들어온 지 겨우 11년 지났는데 벌써 여덟 분이나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제가 사는 나무실 마을에는 열한 집이 있고, 그 가운데 다섯 집에는 아지매(할머니) 혼자 사십니다. 삼사십 년 전만 해도 서른 집이 넘고, 100여 명이 살았다고 합니다. 마을 어르신들은, 지금 마을 전체 인구가 옛날의 한 집 식구도 안 된다며 안타까워합니다. 우리 마을에서는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모두 청년들입니다. 왜냐면 그분들이 돌아가시면 우리 마을도 사라지기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들은 영원한 청년들입니다.
산다는 게 모두 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 사는 것인데, 밥 한 숟가락 목으로 넘기지 못하면 다 내려놓고 떠나야 하는데. 무어 그리 욕심이 많은지… 오늘도 들녘에 서서 가을 햇살 아래 익어가는 벼를 바라봅니다. 젊은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그 날을 꿈꾸며 마냥 바라봅니다.

 

글을 쓴 서정홍 님은 합천 황매산 기슭 작은 산골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이웃과 함께 배우고 깨달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땀 흘려 일하면서 일하는 사람이 글을 써야 세상이 참되게 바뀐다는 걸 깨닫고, 글쓰기에도 힘을 기울여 시집《58년 개띠》(보리), 《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보리), 산문집 <농부 시인의 행복론>(녹색평론사), <부끄럽지 않은 밥상>(우리교육) 등의 책을 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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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개봉한 영화 <암살>에 출연했던 한 배우는 극중 인물의 역할을 위해 체중을 엄청나게 감량했다고 한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먹는 것을 참아야 했던 고통에 대해 말했고, 영화 제작이 끝난 후 ‘가장 먹고 싶었던 음식’에 대해 말했다. 그런데 그가 고백한 ‘가장 먹고 싶었던 음식’은 다소 의외였
다. 그는 흰 쌀밥이 가장 먹고 싶었고, 역시 흰 쌀밥을 먹었을 때 큰 기쁨을 얻었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들었을 때 내 어렸을 적 어머니께서 지어 주시던 흰 쌀밥이 떠올랐다. 어머니께서 담아 주신 따뜻한 고봉밥은 눈물이 날 정도로 맛있었다. 달디달았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가족이 매 끼니마다 솥에 불을 때서 지어 먹던 흰 쌀밥은 우리 가족이 직접 농사를 지어 수확한 것이었다. 우리 가족은 쌀을
얻기까지의 모든 노동 과정에 협력했다.

아버지께서 볍씨를 고르던 것을 우리는 지켜보았고, 논에 물을 들여 못자리를 우리는 함께 만들었고, 아버지께서 써레질을 하시는 동안 우리는 모를 쪘다. 모내기를 위해 쪄서 묶은 모를 논 곳곳에 놓아 두었고, 우리는 함께 모내기를 했다. 모내기를 하면서 우리는 함께 들밥을 먹었고, 모가 잘 자라도록 피를 뽑았고, 농약을 쳤다. 그렇게 함께 노동을 하는 동안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왔다. 가을이 와서 벼를 무르익게 하는 동안 몇 차례 험악한 태풍도 와서 벼와 함께 자라나던 우리의 의지를 꺾어 놓았다. 그러나 우리는 쓰러진 벼와 함께 우리의 의지도 다시 바닥으로부터 일으켜 세웠다. 우리는 함께 벼를 베었으며, 타작을 했다. 벼 이삭이 혹시 더 떨어져 있지 않은지 살피기 위해 우리는 함께 벼 이삭줍기를 했다. 타작을 마치고 경운기에 수확한 벼를 싣고 오던 날의 벅찬 행복과 감동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어머니께서 조리로 쌀을 일 때에는 사락사락 소리가 났다. 우물물로 물의 양을 맞추고 소나무 밑에서 긁어온 마른 솔잎으로 불을 때셨다. 밥이 다 되면 어머니께서는 가족들을 불렀다. 나는 어머니께서 가족들을 밥상 둘레로 불러들이는 그 소리가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소리라고 생각한다. 그 소리는 밝아오는 아침에, 어두워지는 저녁에 멀리멀리 나아갔다. 가족들은 집에서 바깥의 세상으로 나아가기 전에 한 공기의 밥을 먹음으로써 낮 시간에 해야할 노동을 위한 힘을 얻었고, 바깥의 세상에서 집으로 돌아와선 한 공기의 밥을 먹음으로써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밥상 둘레에 함께 둘러앉은 가족의 풍경은 멀리서 보면 아마도 화환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한 공기의 밥을 받을 때마다 감사한 마음을 표현한다. 볍씨가 한 톨의 쌀이 되기까지 수고로운 일을 한 모든 이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현한다. 우리 가족과 흙과 바람과 구름과 비에 감사한다. 실로 한 톨의 쌀은 우주의 협력적 노동이 만들어 낸 기적적인 결과물이다.

 

글을 쓴 문태준 님은 1970년 경북 김천에서 출생했습니다.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시 「처서」 외 9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으며, 전통 서정시의 계보를 잇는 이 시대 대표 시인으로 평가됩니다.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그늘의 발달』, 『먼 곳』,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등의 시집을 냈으며 소월시문학상, 서정시학작품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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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협동조합 활동가인 지인이 전해 준 협동조합이 그려내는 사람 중심의 사회에 대한 이야기는 내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 후 협동조합에 대한 국내외 자료를 읽고 조합 활동가들을 만나면서, 전공영역인 주택산업 분야에 협동조합을 도입하고 싶어졌다. 2011년 9월 지인들과 ‘주택건설협동조합 포럼’을 만들어 전문가와 소비자가 모여 주택협동조합과 관련된 학습과 연구를 진행하면서 향후 주택협동조합의 방향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러한 학습과 연구를 바탕으로 2013년 6월 4일, 주택 소비자들이 모여 우리나라 최초의 주택소비자협동조합인 ‘하우징쿱주택협동조합’(이하 하우징쿱)을 설립하게 되었다. 하우징쿱은 ‘주택을 필요로 하는 소비자들이 자주적인 협동조합 활동을 통하여 양질의 주택을 합리적인 가격으로 마련하는 것과 동시에, 상생의 주거 공동체 건설을 지원해 주는 협동조합’으로 개인과 가족의 행복을 담는 주택, 이웃과 함께하는 커뮤니티 중심 주택, 부담 가능한 경제적인 주택, 지속 가능한 친환경 주택을 주택 공급의 4대 기본 원칙으로 정하여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 첫 결실이 서울 은평구의 ‘구름정원사람들주택’이다.
‘구름정원사람들주택’은 지주가 직접 하우징쿱에 찾아와, 본인이 거주하는 낡은 주택을 하우징쿱 철학이 담긴 주택으로 개발하고 싶다고 요구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하우징쿱은 사업을 추진할 자금도, 조합원을 모집할 매체도, 공급 실적도 없는 신생 협동조합이라 입주 조합원 모집과 선정에 약 5개월이 소요되었고, 건축설계도 소비자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느라 약 6개월이라는 긴 기간이 소요되었다.
‘구름정원사람들주택’은 주택에 대한 개인의 꿈을 최대한 반영시키기 위해 설계 과정에 조합원을 참여시켰고, 입주자 간 소통을 위해 개발 기간 중 입주자모임을 지속하였고, 건물 내부에 이웃이 함께 사용하는 커뮤니티 공간을 만들었다. 공사비 절감을 위해 장식 배제, 단순한 디자인, 실행 공사비 수준의 공사 예산 책정, 개발이익의 소비자 환원, 공동 개발을 통한 취득세 절감 등을 도모하였으며, 지속 가능한 친환경 주택을 위해 철저한 단열 시공, 친환경자재 사용 확대, LED조명 사용 및 태양광 설치 등을 도입하였다.
협동조합이 공급한 주택은 기존 개발업체나 건설업체가 공급한 주택에 비해 소비자 만족도가 높고, 이웃과 함께 어울려 살아 더 행복하며, 구입 비용과 유지 비용이 낮아 경제적 부담이 적고, 화석 에너지 사용 절감을 통한 환경적 지속 가능성을 높일 수 있어 소비자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주택 불안과 주거 공동체 파괴 문제가 심각한 우리나라 환경에서 협동조합주택 또는 협동조합형 공유주택은 새로운 주거 유형의 하나로 인식되면서 빠르게 확산될 것이라 확신한다. 소비자의 주거권 향상과 인본주의 경제 환경 조성을 위해 행복한 사회를 꿈꾸는 많은 이가 스스로 집을 짓는 주체가 되어 사람과 마음이 머무는 집을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

글을 쓴 기노채 님은 소비자를 위한 경제적이고 좋은 주택을 개발하고 건설하는 건축기술사이며, 우리나라 협동조합주택과 공유주택을 개척하는 ‘하우징쿱주택협동조합’의 이사장입니다. 조합원들과 함께 물질이 아닌 인간이 중심이 되는 행복한 사회를 꿈꾸며, 주택협동조합의 발전을 위해 열심히 연구하며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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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설 명절 동안 대형마트에서 판매된 포도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칠레산이 아니라 100% 페루산이었다. 2년 전부터 페루산 포도가 미국산(9~12월)과 칠레산(3~6월)의 중간을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작년 말 <꽃보다 청춘>이라는 방송을 통해 만났던 머나먼 남미의 페루. 그런데 요즘은 포도를
통해 페루를 가까이 마주할 수 있다.
그럼 페루에서 포도가 재배되는 곳은 어디일까. 지난 1월 페루의 포도농장을 다녀 왔다. 페루의 포도산지는 2천 년 전 사람들이 사막 위에 그린 것으로 알려진 나스카 라인 부근의 사막지대인 이카(Ica) 지역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건조하다고 알려진 페루와 칠레 북부의 해안사막지대. 황량한 모랫빛 산들 사이에 거대한 포도농장이 자리하고 있다. 칠레의 과일 산업자본이 들어와 페루 사람들을 노동자로 고용해 대농장을 경영한다. 안데스 산맥의 눈 녹은 물이 지표수와 지하수로 흘러내려 와 이를 관개해 농사가 가능해졌다. 그런데도 근본적으로 물이 매우 귀한 지역이다.
1990년대 후반 페루 역시 외채문제로 외화획득산업을 고심하던 중, 세계은행이 제안한 아스파라거스 수출농업을 사막 지역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머지않아 아스파라거스 수출국 1위에 오른다. 2010년경부터는 수출용 포도가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막에서 행해지는 관개농업은 자연적으로 생성되는 속도보다 더 빨리 물을 고갈시킨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안데스의 눈 녹은 물이 점점 줄어드는 것도 기여했다. 이카 지역의 오아시스들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지역주민들이 생계용으로 농사짓고 마시는 물은 말라붙기 시작했다.
이미 2010년 영국의 언론은 영국이 수입하는 페루산 아스파라거스의 물 발자국 문제를 제기했다. 우리가 무역하는 농축산물을 생산하는데 들어가는 물의 양을 계산하여 그것이 생산지의 환경에 얼마나 부담을 미치는지 살펴보는 방법이다. 물이 부족한 남미나 아프리카의 개발도상국들이 수출용 원예작물을 생산하는데 엄청난 물을 사용하고, 이를 수입해 먹는 선진국 소비자들이 이들 나라의 물 고갈에 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농지와 노동력이 저렴한 제3세계 개발도상국들에서 원예농업이나 축산업, 양식업이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어 2천 년대 들어 급속하게 퍼져나가고 있다. 선진국에서나 하던 산업적 농업방식이 이젠 노동과 자연의 착취를 통해 생산비가 저렴한 제3세계 국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산업적 농업방식의 자연 착취는 비단 물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단작과 화학물질 사용으로 인한 생물다양성과 토양, 생태계의 질 악화 문제는 더는 용인할 수 없을 정도로 전 세계적으로 심각한 상태다. 그리고 자연의 착취는 노동의 착취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다.
페루와 유사한 자연조건을 가진 미국 캘리포니아의 농업이 최근 지구온난화로 인한 심각한 가뭄으로 150년 만에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캘리포니아 물의 80%는 농업에 쓰이는데, 이곳에서 생산된 오렌지, 아몬드, 포도 등의 농산물은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로 수출된다. 미국이든 영국이든 남미든 아프리카든 산업적 수출농업이 물 고갈의 원흉이고, 로컬푸드의 활성화가 문제 해결의 근본책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가는 이유다.

 

글을 쓴 허남혁 님은 (재)지역재단 먹거리정책·교육센터 센터장으로 로컬푸드, 학교급식, 도시먹거리정책 등 생산자와 소비자가 가까워질 수 있는 대안먹거리운동과 정책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내가 먹는 것이 바로 나>(2008)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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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아카시아 꽃이 휘날리며 떨어질 때면 무위당 선생이 생각난다. 매년 5월 셋째 주말이면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이 그의 묘소에 모여 아카시아 그늘 아래서 밥 한 그릇 모셔 들고 선생의 말씀을 되새기며 우리의 갈 길을 되돌아보곤 한다.
몇 년 전 이현주 목사님께 글씨를 받으려고 뵌 적이 있다. 그때는 전국을 쏘다니며 무위당 전시회를 개최하며 일을 펼치고 다닐 때였다. 열심히 일에는 몰두하고 있었지만 늘 마음에 걸렸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선생의 유훈인 “내 이름으로 아무 일도 하지 마라”는 말씀이었다. 혹시 내가 하는 일이 선생의 유훈을 어기고 선생을 팔고 다니는 것은 아닐까 은근히 고민이 되었다. 그래서 목사님께 고민을 말씀드렸더니 웃으면서 한 말씀 해주셨다. “걱정 마시게, 선생님 말씀은 억지로 무엇을 이루려 하지 말라는 말씀이지요. 사과나무를 심고 열심히 가꾸면 나무가 잘 자라서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게 되고, 그럼 그 과실을 따서 감사히 먹으면 되는 거예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지. 그런데 우리는 가끔 욕심이 과해져서 자연을 거스르게 돼요. 돈 욕심으로 과실을 먼저 생각하고 사과의 개수를 늘리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나무를 무리하게 키우려고 하지요. 이러지 말라는 거예요.”
요즘 우리 사회는 돈 욕심에 눈이 멀었다. 어려서부터 경쟁논리가 뿌리깊이 심어지면서 우리는 무리를 해서라도 결과를 얻어내려고 모두가 불안해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생명보다 사람보다 돈이 먼저인 세상이 되었고, 결국 세월호의 어린 생명들을 깊은 바다에 무참히 버려두고 도망쳐버렸다. 참으로 한심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데 아직도 상대를 향한 싸움으로 날을 지새운다. 자연을 거꾸로 살아가는 현대인의 초상이다.
한살림이 30년이 되었다. 조합원은 50만 가족이 넘었단다. 작은 쌀가게에서 시작해서 이제는 커다란 거목이 되었고, 전국 방방곡곡에 새로운 한살림 나무가 심어지고 퍼져가고 있다. 그동안 고 박재일 회장, 이상국 대표를 비롯한 수많은 분의 노고와 열정이 있어서 가능했다. 참으로 고마운 자기희생의 모습이었다. 세월이 흘러 30년이 지났다는 것은 한 세대가 지났다는 것이다. 그럴 즈음엔 어떤 조직이든 많은 결실과 더불어 또 다른 문제에 봉착한다. 지금의 한살림도 여러 문제 앞에 직면하고 있다. 예전만큼 신선하지 않을 수도 있고, 처음의 정신을 잠시 잃을 수도 있다. 그에 따라, 매출의 정체성도 나타나고, 지역과 서울,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현실적인 의견대립도 보일 수 있다. 더욱이 매출을 유지하기 위해 가공사업이 중심이 되어 공익적 취지가 개인화되면서 돈 중심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 모든 것이 때가 되어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다.
이제 한살림은 이런 문제들을 함께 극복하고 새로운 30년을 준비해야 한다. 한살림은 원래 사업을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 아니고, 함께 사는 세상을 꿈꾸기 위해 만들어진 운동조직이다. 나무가 자라 거목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열매의 결실을 맺어 그 과실을 우리가 함께 나누는 것이다. 한편, 한살림 운동을 잘하기 위해서는 사업 역시 잘 되어야 한다. 그래야 많은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할 수 있고, 많은 일자리를 통해 모두가 함께 살 수 있다. 운동과 사업은 모두 소중하다. 단지 순서가 잘못되어 억지로 무엇을 이루려 하면 그때부터 문제가 심각해질 것이다. 한살림 처음의 정신을 늘 되새기며, 앞으로 30년을 새롭게 우리 모두가 함께 준비하면 참 좋겠다.

 

* 무위당(无爲堂) 장일순 선생(1928~1994) 1960, 70년대 지학순 가톨릭 원주교구 주교 등과 민주화운동과 신용협동조합운동, 사회개발운동을 이끌었다. 1980년대에는 ‘한살림농산’을 설립한 박재일 등 도반들과 사람과 자연, 도시와 농촌이 함께 사는 생명공동체를 위한 한살림운동을 펼쳐 한살림의 정신적인 터전을 마련했다.

 

글을 쓴 황도근 님은 물리학자이며 상지대학교 교수입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뜻을 좇아 학자로서의 본분만큼이나 생명운동가로서의 활동과 발언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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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의 마음]

겨울에 먹는 묵은 나물 한 그릇이 약


어떤 음식을 먹든 몸을 가볍게 

하는 음식이 최상의 음식이다. 

약은 멀리 있지 않다. 인공이 

덜 가미된, 담백하고 정갈하고 

정성을 들인 음식이 곧 우리 

몸을 살리는 약인 것이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추억의 밥상이 떠오른다. 어릴 적 어머니가 차리셨던 정월 대보름 밥상. 그 밥상은 대보름달만큼이나 넉넉하고 풍성했다. 찹쌀, 콩, 수수, 팥, 기장을 넣어서 지은 오곡밥과 봄부터 가을까지 말린 묵은 나물, 집에서 기른 콩나물, 무를 채 썰어서 기름에 볶은 무나물, 귀밝이술과 부럼이라고 해서 딱딱 깨 먹는 볶은 콩, 땅콩, 호두 같은 견과류…. 밥상 주위에 식구들이 둘러앉으면 어머니는 오곡밥을 식구 수대로 한 그릇씩 떠서 골고루 나눠 주셨고, 밥을 먹고 나면 아버지는 우리에게 귀밝이술을 작은 잔에 담아서 한 모금씩 마시게 했다. 그리고 이날의 오곡밥은 우리 식구만 먹는 게 아니라 이웃과 나누어 먹었고, 이웃집에서도 오곡밥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런 기억 때문일까. 나는 지금도 정월 대보름이 돌아오면 어머니가 차려주셨던 밥상을 우리 가족에게 차려주려고 노력한다. 


대대로 전해져 온 이런 식습관은 다 까닭이 있다. 우선 오곡밥을 해서 여러 집이 나눠 먹으면 이 집 저 집에서 밥을 할 때 넣는 재료가 조금씩 달라서 영양분을 골고루 섭취할 수 있다. 또 부럼을 깨 먹으며 평소에 결핍된 단백질과 지방질을 보충했다. 우리 어릴 때만 해도 영양실조로 머리와 몸에 부스럼이 나고 얼굴에 마른버짐이 핀 애들이 많았다. 또 귀밝이술은 데우지 않고 차게 마시게 했는데, 귀가 밝아질 뿐만 아니라 1년 동안 좋은 소식을 듣는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시곤 했다. 나물이 주는 영양소를 얻기 어려운 겨울철, 묵은 나물을 준비해 두었다가 먹었던 우리 조상들의 생활의 지혜가 참으로 놀랍다. 겨우내 추위로 인해 냉해진 몸에는 쓴나물 같은 것이 좋고 또 쓴맛은 심장과 비위를 튼튼하게 한다. 오늘날 우리는 사시사철 기름진 것과 단 것을 지나치게 많이 섭취해 숱한 병을 달고 살지 않던가.


일찍이 잡초에 눈뜬 우리 가족은 겨울을 대비해 봄부터 여름까지 잡초를 뜯어말려 묵은 나물을 만들어 놓았다. 잡초에는 천연의 향기와 영양이 듬뿍 담겨있다. 먹을 수 있는 온갖 풀을 베어다 살짝 삶아서 가을볕 아래 말려놓고 풀이 그리워지는 겨울철 양식으로 삼는다. 눈을 밝게 하고 간을 치료하며 맛도 담백한 질경이, 해독작용을 하며 소화를 돕고 혈당이 높은 사람이 꾸준히 먹으면 좋은 개망초, 오메가3가 풍부하며 심혈관계 질환에 좋은 쇠비름, 고혈압과 폐 질환에 좋은 환삼덩굴, 해독 효능이 있고 대장염에도 좋은 명아주, 피를 맑게 하고 항암작용에 좋은 까마중, 단백질이 많으며 칼슘과 철분이 많고 각종 성인병에 좋은 뽕잎 등등. 나는 이런 재료로 나물을 볶아 정월 대보름 밥상에 올린다. 묵은 나물 말고도 여러 가지 잡초를 삶아서 냉동실에 넣어두었다가 불린 쌀과 함께 방앗간에서 빼놓은 잡초 절편으로 떡국을 끓이고, 잡초를 넣어 만두도 빚어 먹는다. 잡초 나물이나 잡초 절편은 먹고 나면 소화가 잘되고 몸이 가벼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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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섭


“아이의 휴대전화 번호를 없애지 못했습니다. 아이한테 가끔가다 카카오톡 이런데다 편지를 씁니다. ‘잘 지내고 있지’ 이렇게… 휴대전화는 항상 충전기에 꽂힌 채 24시간 켜있습니다. 그러면 중학교 때 친구들이 딸에게 카카오톡을 보내요. 어떨 때는 밤에도 계속 울려요. 카톡,카톡 그러면서… 보니까 중학교 때 단짝인 아이가 ‘보고 싶다’, ‘사랑한다’고 계속 쓰고 있더군요.”

휴대전화 소리에 잠을 깨는 세월호 아빠의 이야기가 가슴을 때립니다. 유족들 대부분은 아직 아이들의 사망신고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직 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억울하고, 분하고, 한스럽고, 안타깝고, 또 너무도 사랑하여 아직 아이의 자취를 지울 수가 없습니다.

아닙니다. 보내지 않은 것이 아니라,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련이 남아서가 아닙니다. 하늘을 거스른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살릴 수 있는 영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영혼을 향해 정치논리로 찬반을 논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잊지 말자는 것이 아닙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알아차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공포와 절망에 떨던 아이들이 바로 나였다는 것을.

아프지 않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발가락 끝에 가시가 박혔을 때, 우리는 비로소 발가락의 존재를 알아차립니다. 복통으로 내장이 뒤틀릴 때, 우리는 비로소 위장과 하나였음을 자각합니다. 나의 몸이지만, 아프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참혹한 고통이 있을 때에만 ‘숨겨진 하나 됨’이라는 잊힌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한국사회가 하나의 커다란 생명체라면, 우리 사회 어느 구석에서 누군가 비명을 지르며 죽어갈 때 우리는 비로소 사회적 몸의 존재를 알아차립니다. 세월호 참사가 없었다면 우리는 단원고 아이들을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세월호라는 배의 존재도, 선장과 선원도, 해양수산부와 해경의 실체도 인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세월호의 아픔과 죽음이 우리가 하나였음을 일깨웠습니다.

유럽의 어느 공동체 이론가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타자가 혼자 죽어가지 않도록 타자를 위로한다.” 그렇습니다. 돈도 권력도 언론도 외면하는 이른 새벽 노숙자의 죽음과 깊은 산 속 요양병원의 죽음에 연민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 진정한 공동체입니다. 죽음의 공동체야말로 진정한 공동체인지도 모릅니다. 타자라고 생각되었던 그는 타자가 아니었습니다.

무위당 장일순의 깨달음이 생각납니다.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곧 나였다는 것을.” 세월호의 공포, 세월호의 눈물, 세월호의 죽음 앞에서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생명은 하나라는 것을.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습니다. 이미 우리의 몸과 마음엔 각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기억으로 떠올리지 않아도 이미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아픔 때문에 되살아난 것뿐입니다. 오늘 아침 내 안의 휴대전화 울림이 보이지 않는 하나됨을 일깨웁니다.

글을 쓴 주요섭님은 한살림전북과 모심과살림연구소에서 생명사상과 협동운동에 대한 연구와 교류 활동을 펴왔습니다. 현재는 한살림연수원에서 ‘한살림사람’을 기르는 일을 돕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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