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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지에서 온 소식/살리는 이

손끝농사로 쫀득한 손맛 나는 찹쌀을 내다 - 홍천 명동리공동체 찹쌀 생산자 최원국 씨


손끝농사로 쫀득한 손맛 나는 찹쌀을 내다

홍천 명동리공동체 찹쌀 생산자 최원국 씨


글‧사진 김세진《살림이야기》편집부


농민 최원국. 그가 내민 명함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수식어가 간결하다. 올해 쉰아홉인 그가 농사를 지은 햇수만 마흔 해니 다른 말이 필요 없을 법도 하다. 그중 주관대로 농사한 햇수, 스스로 농사꾼이라 여기며 땅을 일군 해가 서른다섯 해다. 군대 간 3년, 중장비 운전기사 3년을 뺀 햇수다.

 그는 난 지 100일 만에 이곳, 홍천군 남면 명동리에 왔고 한곳에서 자라 뿌리내렸다. 어릴 적 그의 아버지는 500~600평 쌀농사를 지었지만 집에는 늘 쌀이 귀했다. 내다팔기도 빠듯했던 사정을 알기에 스스로 농사를 지을 생각이 없었다. 젊은 패기에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싶었다. 도시에서 중장비운전을 배웠고 그를 필요로 하는 현장에서 일한 지 몇 해, 그는 자기 업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진짜 농부가 되기로 했다.

 농민 최원국은 33,057.851㎡ 논에서 찹쌀을, 밭 6,611.57㎡에서 고추·찰옥수수·들깨·콩을 내고 있다. 지금은 내외가 거뜬히 감당하고 있지만 처음부터 쉽지는 않았다. 1970년대 식량증산을 강조하는 정부 방침에 따라 그도 농약을 쳤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구토와 두통에 시달렸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던 때, 이웃에 살던 농부가 무농약농사를 제안했다. 20년 전인 1994년, 여섯 가구가 건강한 농사를 짓기로 마음을 합쳤다. 지금은 서른다섯 농가가 된, 홍천생산자연합회 명동리공동체는 이렇게 시작됐다.

 뜻은 좋았지만, 높이 자라는 풀과 늘어가는 벌레를 어쩔 도리가 없었다. 틈만 나면 유기농을 먼저 시작한 곳을 견학했다. 목초액, 현미식초, 청초 발효액 등 제초에 좋다는 것도 실험했다. 하지만 결과는 탐탁찮았다. 실패를 거듭한 지 네댓 해 되던 1998년 오리농법을 알게 되었다. 오리는 풀이 자라지 않게 했고 벼물바구미 같은 해충도 먹어 없앴다. 예상 외로 대풍년을 맞았다. 이듬해인 1999년, 유기농가가 열다섯으로 늘어났다. 정부에서 친환경농업특성화시범마을로 지정했고, 성남 지역의 소비자와 연결해 주어 판로도 확보했다. 걱정이 없다고 생각했다. 가을을 맞았고 잘 영근 쌀을 들고 성남으로 갔다. 그런데 소비자들이 시골에서 쌀을 보내오고 있다, 식구들이 얼마 없다는 말을 하며 쌀을 사 주지 않았다. 막막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한살림의 박재일 전 회장이 이 마을을 방문해 어렵게 농사지은 벼를 한살림에서 소비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초상집이 잔칫집이 된 날이다. 그렇게 해서 2000년부터 한살림과 인연이 닿았다. 살 길을 찾은 최원국 생산자와 유기농부들은 주민을 설득했고,


 2001년 명동리는 전국 최초로 ‘농약 없는 마을’을 선포했다. 힘든 유기농사를 짓자고 말로만 할 수 없어, 먼저 나서 이웃의 둑에 김을 매주기도 했다. 그리고 연구를 거듭했다. 2003년 조류독감이 돌면서, 우렁이농법을 시작했다. 우렁이는 풀만 먹고 해충을 먹지 않아 염려가 되었지만 다행히 피해가 크지 않았다. 독성이 강한 풀에서 채취한 성분으로 만든 유기 해충퇴치제를 쓰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작물 자체가 튼튼해져 병충해를 거뜬히 견뎌낸 것이다. 화학비료를 쓸 때는 도열병이나 이화병나방 폐해가 심했는데 그런 일도 사라졌다.

 제 생명을 스스로 지키는 작물들이 기특하다. 어느덧 올해도 찰벼가 노랗게 영글었다. 농사 다 지었다고 생각해도 될 텐데 그는 오늘도 두둑 어딘가로 논물이 흐르지는 않는지 발품을 팔고, 듬성듬성 자란 피를 손으로 죽 뽑는다. “유기농은 손끝농사”라는 그의 손이 억세고 야물다. 손끝농사라 농부의 손맛을 탄 것일까. 햅쌀로 지은 밥 한 수저 뜨니 윤기가 자르르. 고것 참 찰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