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에 옻칠 숨결을 불어넣어 만든 생활용품
한살림 옻칠생활용품을 생산하는 정선공방
정리 편집부



물이 자주 닿으면 상하기 쉽고, 벌레가 먹기도 쉬운 나무. 하
지만 그 나무를 잘 손질하고 여러 번에 걸쳐 옻칠을 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면 가볍고 쓰임이 많은 실용적인 그릇과 도구가 된다. 상처가 나지 않도록, 씻을 때 부드러운 천으로 닦아주면 오래도록 사용할 수 있다.은은한 빛깔과 나무의 결이 살아있는 옻칠그릇은 자연을 닮았다.

한살림의 여러 조합원들이 사랑하는 옻칠생활용품은 중요무형문화재 10호 나전장 이형만 선생에게서 기술을 전수받은 가족들이 운영하는 원주의 정선공방에서 만들고 있다.

이형만 선생은 중학교 시절, 나전칠기로 유명한 고향 통영의 기술원양성소(오늘날의 공예학교에 해당)에 입학하여 스승 김봉룡 선생을 만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나전칠기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옻생산지로 유명한 원주에 스승이 공방을 열게 되자 이형만 선생도 원주로 오게 되었고, 이곳에서 장일순 선생과의 인연도 시작된다. 장일순 선생의 수묵화를 복사해 나전으로 만든 것을 인사동에 전시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것이 사회적으로 큰 호응을 얻은 것이 무명이나 다름없던 이형만 선생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였다. 기술적 스승이 김봉룡 선생이라면 평생의 정신적 스승은 장일순 선생으로, 이형만 선생이 무형문화재 지정을 받고 장일순 선생을 뵈러 갔을 때 ‘나서지 마라. 나서면 꺾인다’라고 하신 그 말씀을 평생 기억하며 절제하는 마음을 가져왔다고 한다.                   

한살림의 옻칠생활용품을 생산하는 정선공방의 문정선, 이미숙 두 생산자도 여러 공예대전에서 수상을 하며 솜씨를 인정받은 실력파이다. 문정선씨는 이형만 선생의 부인, 이미숙씨는 여동생으로 오랜 기간, 장인정신을 오롯이 담은 작품 활동에만 몰두하는 선생의 작업으로는 생활이 어려워, 곁에서 익혀온 기술로 옻칠생활용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옻칠의 매력에 점점 빠져들고 있으며, 틈틈이 만든 작품을 공모전에 내놓았는데 여러 번의 수상을 했던 것이다.

정선공방에서 사용하는 원주옻이 생산되는 원주지역은

질 좋은 수액을 가진 옻나무가 자라기에 딱 알맞다고 한다. 그래서 원주에서 생산되는 옻은 세계적으로도 알아주며 원주가 옻칠로 유명해지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하지만 원주 옻은 워낙 생산량이 적고 값이 비싸 어쩔 수 없이 원주옻과 질이 좋은 중국산 옻을 까다롭게 골라 함께 사용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어렵게 얻은 귀한 옻이라도 장인의 손길을 만나야만 옻칠생활용품으로 만들어진다. 나무로 만들 형태를 미리 깍아 놓은 ‘백골’에 정제된 옻을 칠하고 말리고 사포로 다듬고 다시 칠하고 다듬는 수 십, 수 백 번의 손길, 오랜 기다림을 거쳐야만 비로소 완성되어진다. 이러한 과정을 찬찬히 들여다보게 되면 우리는 제대로 된 값어치를 치르고 옻칠의 아름다움과 쓸모를 누리는 걸까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원주에서 옻을 채취하는 기능인도 이제 몇 사람 없다고 한다. 어렵게 채취한 옻으로 쓸모 있는 도구를 만드는 장인도 마찬가지. 자연에서 온 재료에 수십 번 사람의 손길이 더해져야만 탄생하는 귀한 옻칠제품. 생활에 풍요로움을 더해주는 우리의 전통문화 옻칠을 지켜내기 위해선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생활공간에 하나 둘 옻칠제품을 늘려가 보는 것이 하나의 방편이 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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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를 이은 가보家寶 단감
전남 담양군 시목마을 최덕순 생산자 이야기



글|최은희․한살림정읍전주 조합원



전남 담양군 금산면 시목마을.

이름 그대로 감나무가 많은 마을은 산속에 새집처럼 동그랗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전국 최초 유기농 생태마을로 지정된 이 산골마을 꼭대기 1만 2천평의 밭에서 최덕순 생산자는 단감과 매실 농사를 짓고 있지요.



년이 넘은 소나무가 몇 그루 운치 있게 자라는 마당과 자그마한 집을 제외하면 빙 둘러 사방이 감나무 밭 천지입니다. 8월의 감나무에는 싱싱한 초록의 감잎 아래 도리납작한 단감들이 풋풋하게 매달려 있습니다. 이곳의 감나무는 햇님 달님에서 나오는 호랑이가 도끼로 찍어가며 오르던 까마득한 꼭대기가 없어요. 나주 배나무처럼 가지가 밑으로 낭창히 휘어져 팔을 뻗으면 감이 쉽게 손에 닿아 신기합니다. 감나무들은 야트막한 언덕의 굴곡을 따라 끝없이 이어져있는데 이 감밭을 올해 예순 여섯의 최순덕 생산자는 밤낮으로 스쿠터를 타고 누빈답니다.

남편과 사별한지 17년. 남에게 보증을 서 주었다가 부도를 맞고 도청 공무원도 그만둔 남편은 홧병으로 눈까지 어두워져 1년 밖에 더 살지 못할거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마지막으로 시아버지 묫자리로 샀던 이 골짜기로 들어왔습니다. 시어머니와 졸망졸망 어린 아이 넷을 데리고 어쩔 수 없이 따라 들어온 것이 삼십년 전. 여기로 들어와서 대추나무를 심었다가 비 피해로 죽어 다 뽑아내고 사과나무, 배나무를 심었다가 파내고 감나무를 심으며 남편은 몇 년을 땅과 함께 살다 곁을 떠났습니다.


남편이 저 세상 사람 되었을 적에 동네 사람들은 나보고 저 부지런한 사람이 여그서 감나무나 붙들고 살 수 없을 거라고 했거든. 젊었을 적에 남편 번듯하게 공무원 할 때도 일이 하고 싶어 땅장사, 집장사, 식당일, 청소부일... 오만가지 안해본 일이 없었으니 뭘 해도 못하랴 싶었지만 근디 농사짓고 살다 보니 밖으로 나가 장사하며 허덕거리며 살고 싶지가 않더만.


그때 우리 동네 감나무 작목반이 13명이었는디 나만 혼자 여자로 들어간거지. 어느 날 그러대. 우리가 감나무를 친환경으로 재배하자. 농약 안치고, 비료 안치고 그러면 땅도 살고, 감도 좋은 값을 받을 수 있다. 그 말 듣고 밤새 생각했지. 그러고 해도 감이 남아날랑가 걱정이제. 그러다가 아~ 내가 언젠가는 이 땅을 자식에게 물려줘야 하는디 땅을 살려서 물려줘야지 싶어서 바로 다음날 가서 그랬제. 나도 한번 따라가 볼라요. 열셋이 시작을 했는디 지금 유기농으로만 하는 집은 나까지 세집이 남았어. 동네사람들이 나보고 그러대. 참말로 기어니 따라가네!


원래 유기농 안하고 일반으로 지을 때 만 이 천평 밭에서 감 900톤을 따요. 농약 안치고 농사지으니 벌레가 너무 먹어 40톤도 안나오드만. 4년간 울면서 인건비, 자제비가 다 빚으로 쌓여 가는디 동네에서는 미쳤다 미쳤다 해쌓고. 아이고~ 내가 내년에는 꼭 약 쳐분다. 결심을 허지만 봄이 오면 안되지. 내가 이 땅을 살려서 자식한테 물려줘야지 죽은 땅을 물려줘서는 안된다. 그러고 그 미친 짓을 계속 했지요. 벌레가 끓으면 감 한 개, 두 개가 아니라 근방을 다 망쳐버리니 하도 폭폭해서 밤에 이불 보따리 싸들고 애들 아버지 무덤으로 가서 벌레 잡는 법 좀 갈쳐주시오! 하며 울었제. 암만 그래도 안 갈쳐 주드만. 풀약 못하니 감나무 밭의 풀을 예취기로 다 비어야 하는디 땅은 넓제, 일은 많제 몸에 손전등 달고 밤에도 풀을 비었당게. 밤 2~3까지 터파 (땅을 파는 일)하고 그러고 사니 하루에 세, 네 시간 자고, 새벽 네 시에는 일어나야 아침밥 먹기 전에 한나절 일을 하니까.


그란디 내가 바쁘게 살아온 것이 꼭 농사일 때문만은 아니고. 전남 담양군 여성협의회 회장으로 봉사활동을 열심히 했다고 대통령상을 받았거든. 뭔 일이든 일하는 걸 좋아해서 재미있게 했을 뿐인데. 시어머니가 97세에 돌아가셨는디 마지막 3~4년은 치매에 걸려 내가 고생 좀 했는디 도지사가 효부상도 주고. 지금도 동네 어르신들이 저한테 수제비 끓였으니 내려와 묵어라! 된장 지졌응께 혼자 밥 묵지 말고 싸게 내려오라. 오늘도 말복이라 동네 사람들 모여 어르신들 식사대접하기도 했고. 우리 마을이 그런 것이 참 좋아. 그래서 노인 요양사 자격증도 땄어. 공부 별로 안 어렵드만. 사람들이랑 일하고 먹고 노는 것이 사는 거지. 마음 맞춰주면 다 좋아하지. 나는 사는 것이 그래서 재밌어요.

아들 필훈씨와 함께이기에 더욱 행복한 최덕순 생산자



광주서 은행 다니고 있는 아들한테 “니가 아무리 벌어봤자 쓰기 바쁘고 돈도 못 모으는디 여기 감농사는 열심히만 하면 몇 배로 났다. 한살림에서는 감도 대접받고 농사짓는 사람도 대접받는다. 좋은 농사지어 사람들 먹여 살리니 얼마나 좋냐. 그러니 들어와서 동네 사람들이랑 재미지게 농사를 지어라, 내가 니 물려줄라고 이렇게 땅을 가꿔놨는디 인자 나는 늙어 힘이 없다. 니 아니면 누가 허것냐” 해서 지금은 들어와서 소도 40마리 키우고, 그 소 거름으로 감나무를 키우니 감도 좋고. 나도 아무 걱정 없지라.



시목마을은 무항생제 축산마을로 지정되어 친환경 방법으로 소를 기릅니다. 소는 농약 안친 감나무 그늘에서 자라는 풀을 먹습니다. 그 소의 똥은 거름이 되어 감나무를 살리고 그 나무에서 열린 감을 사람들은 맛있게 먹고……. 이 아름답고 놀라운 순환의 한가운데 예순이 넘어서도 호랑이 등에 올라탄 장수와 같은 최덕순 생산자가 있습니다.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자식 농사짓는 꼴 못 본다고 논 팔고 소 팔아 공부 가르쳐 자식들 도시에서 사는 걸 출세라고 생각하는 시절에 자식에게 살아있는 땅을 물려주겠다는 꿈을 품은 어머니. 햇볕에 탄 가무잡잡한 얼굴. 이 놀라운 농부의 얼굴에는 신기하게도 혼자서 농사짓는 여인네로 살아온 삶의 그늘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농사를 자식에게 물려줄 자랑스러운 가업으로 바꾼 강단진 품위가 서려있습니다. 부모가 살려놓은 땅에서 다음 세대는 더 멋지게 농사짓고 살 것이라는 짱짱한 낙관 속에 농장의 감들은 8월의 햇빛을 흠뻑 삼키며 단물이 고여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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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윤미라 · 한살림서울 홍보위원회

한살림 생각대로 움직이다보니

강원도 홍천 산으로 둘러싸인 화촌면 야시대리 깊은 숲속 마을에 우리의 전통 먹을거리를 지켜 나가기위해 쉼 없이 도전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한 남자가 있다. 바로 한살림의 단호박찐빵, 단호박술빵, 감자떡, 보리찐빵을 생산하고 있는 봉식품의 사공 김봉석(50) 대표이다. 매일 새벽 4시면 일어나 부인 박명점 여성생산자와 세 딸들의 응원을 받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열혈 생산자로 소문이 자자하다.



오랜 세월 젊은 청춘을 불태웠던 바다와의 인연을 접고 지금 생활하는 이곳에 새 터전을 잡게 되었다. 오랫동안 꿈꿔 왔던 친환경농업의 길이 육지에서 시작된 것이다. 처음으로 시작한 것이 축산, 다음이 유정란으로 서울의 한 아파트에 1년 동안 용감하게 무인판매를 시도했다. 생각보다 수금률은 아주 낮았다. 그렇게 서울을 오가며 우연히 보게 된 것은 바로 ‘한살림 공급차량’이었다. 이렇게 한살림과 인연이 되어 1993년부터 4년 동안 한살림에 유정란을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퍼뜩 와 닿은 건 고유의 맛을 내는 전통 식품을 만들고 싶다는 강한 끌림이었다.



숱한 시행착오 뒤에 탄생한 단호박찐빵

그리하여 선택한 것이 감자떡과 찐빵류. 인공 첨가물 없이 원래의 재료로만 전통 찐빵 맛을 내기란 첩첩산중이었다. 오랫동안 우리나라에서 유명하다는 찐빵집을 거의 방문하여 묻고 또 물으며 메모하고 실습을 해보았지만 실패의 연속이었다. 주재료인 단호박은 껍질을 깐 상태에서는 보관이 어려웠고, 냉동보관을 하면 다른 향이 나서 또 다른 방법들을 찾으며 시행착오를 거듭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성공한다’는 믿음으로 꾸준히 노력한 결과 드디어 2002년 한살림 조합원에게 단호박찐빵을 선보이게 되었다.

봉식품에서 생산되는 물품의 모든 재료는 한살림 생산지에서 재배한 농산물을 이용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특히 보존제와 색소, 유화제 등 화학첨가제와 동식물성 유지방사용, 환경호르몬 유발 용기 등을 일체 금지하고 있다. 생산과정이 너무 까다로워 물품으로 전해지기까지에 어려움이 많지만 전통방식과 한살림의 생산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것에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김봉석 대표는 우리나라 특별한 식문화인 술빵과 강원도 감자떡의 전통 고유의 맛을 지키고자 각별히 애정을 쏟고 있다. 시중의 옥수수가루로 만든 술빵과 차별화하기 위해 국내에서 유일하게 한살림 단호박을 이용해 술빵을 만들고, 감자떡은 무농약 이상의 감자를 원재료 하고 있다. 최근 원료값이 급격히 올랐음에도 처음 가격 그대로 현재까지 생산되고 있다.



소비자의 안전과 건강 앞에 타협 없다

일의 능률이나 편리함을 위해 흔히 쓰는 플라스틱류 등 환경호르몬을 유발하는 자재를 일체 금지하고 있으며, 찜기 또한 스팀 보일러(배관자재가 철임)를 사용하지 않고 스테인레스로 완성된 찜기를 사용하고 있다. 고유의 방식으로 100%감자만 삭혀서 만든 냉동감자떡은 시중의 감자떡(타피오카를 주성분으로 한 수입 혼합 가루를 원료로 만든)과의 맛과 영양은 단연 다르다. 요즘에는 잊혀져 가는 고유의 맛을 계승하고 환경을 살리는 대안농업을 위해서 수리취떡, 옥수수, 감자 등을 이용한 제품을 연구 중이라고 한다.

봉식품의 재료들은 반죽되는 즉시 영하 40도에서 급냉하여 영하 20도에서 보관되어 맛과 영양이 그대로 살아있다. 그 과정에서 김봉석 대표는 반죽과 숙성을 지금까지 손수 해오고 있는데 기계에 모든 것을 의지하지 않고 오랫동안 익혀온 손맛을 믿는다. 그래서 반죽의 온도, 습도, 숙성 어느 한 가지라도 엇박자를 내지 않기 위해 언제나 긴장의 연속이다.



얼굴을 보며 신뢰가 오가는 만남은 중요하다

내년 봄날이 오면 가까운 곳으로 봉식품 생산공장을 이전하여 물품이 생산될 예정이다. 하나하나 직접 정성들여 설계한 설계도에는 그의 다부지고 순수한 미래가 담겨 있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복지와 무엇보다 위생, 안전에 중점을 두었다. 이전 후 공간의 여유가 생기면 한살림 소비자들과의 만남도 자주 만들어 볼 예정이다. 그동안 1인 다역을 해내느라 소비자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특히 물품의 생산과정을 보여주고,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길가다 우연히 들르는 여행객들도 활짝 열린 마음으로 맞이하는 인심 또한 후덕한 김봉석 대표. 고집스런 생산방식 그대로 흔들림 없이 지금까지 잘해왔듯이 앞으로도 묵묵히 걷는 발걸음으로 우리 맛 지키기를 이어가리라 믿는다.













































*봉식품 김봉석 생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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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명구 성남용인한살림 실무자

부부와 가족이 다 뛰어들어도 힘이 모자라는 농사를 권선분 생산자(50)는 여자 혼자서 짓는다. 감자, 잡곡, 벼, 메주콩, 호박 등 7,000평의 논밭 농사를 짓고 소도 열댓 마리 키운다. 해 뜨기 전 논에 나가 해질녁에 집으로 돌아온다. 오후에 1시간 정도 잠깐 눈 붙이는 시간을 빼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정신이 없다. 그래도 일손이 모자랄 때가 많다.


가뜩이나 바쁜 농사가 더 바빠진 건 2007년 가을 남편 김근호 생산자를 곁에서 떠나보내면서부터. 그때가 지금껏 농사를 지어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홀로 된 슬픔을 다 추스르기도 전에 논을 파종할 시기는 닥쳐왔다. 그 다음해는 유난히도 일이 손에 안 잡혔다. 논은 나락보다 피가 더 많아 피 바다였다. 논밭에 나가지 않고 그냥 하루 종일 멍하니 축사에 앉아 소밥만 주고 있을 때도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밭에서 잡초가 빨리 자기를 뽑아 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하면 30년 가까이 해온 한살림 농사를 더 이상 못하겠구나 싶었다.


마음을 다 잡고 다시 논밭에 들어갔지만 농사는 쉽지 않았다. 혼자인 게 얼마나 버거웠던지 ‘그냥 한살림 농사 포기하고 농약 칠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외로운 삶에, 힘 딸리는 농사가 그래도 가능했던 것은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공근공동체 생산자 동료들은 “지금까지 고생고생해서 유기농을 해 왔는데 이제 와서 어떻게 약을 쳐요” 하며 만류했고, 밭에 고랑을 내는 일 등을 도우며 일손을 보태주었다. 정말 손이 모자랄 때는 사회봉사 명령을 받은 아저씨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밭농사를 망쳤을 때, 한살림 소비자 조합원들이 모아준 성금도 액수는 크지 않았지만 그에게 큰 힘이 되었다. 사람 사는 일이 혼자 사는 게 아니듯, 농사도 혼자 하는 게 아니었다.


어려운 사람 마음은 어려운 사람이 안다고 도움 받았던 경험 때문인가. 권선분 생산자는 2010년 초에 열린 강원도 여성생산자협의회 연수에서 한 사람이 한 달에 천 원씩 모아서 불우이웃을 돕자고 제안했다. 그때 그는 “한살림을 하면서 내가 농사한 것만 팔아먹으려고 하면 안 된다. 한살림 농사는 생명 농사 아니냐. 그냥 먹을거리만 생산하는 걸 넘어서 나보다 더 어려운 곳도 도와야 한다”고 생산자들을 설득했다. '유기 농사 잘 지어 환경 살리자'는 연수 자리에서 생산자들은 다른 사람들도 살리자는 마음으로 십시일반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해 겨울까지 강원도 여성 생산자들은 100만 원이 조금 넘는 돈을 모아서 파키스탄 수해 피해자들을 돕는 데 보냈다. 2010년 한해 이상기후로 막심한 손해를 입은 생산자들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할 때 결코 작은 돈이 아니었다.


그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더불어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 자신이 한살림 농사를 특히 좋아하는 이유라고 했다. 생산자가 힘들 때 소비자가 돕고, 생산자는 자신보다 더 어려운 곳을 돕는 게 무척이나 뿌듯하단다. 금액이 크건 적건 따뜻한 마음을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거라면서.

 

건강한 먹을거리를 생산해 사람들이 건강해져서 좋고, 함께 서로 도울 수 있어 한살림이 좋다는 그에게 어떤 마음으로 한살림 농사를 짓는지 궁금해 물었다. 그는 “농사는 내 전부에요. 내 전부를 바쳐서 농사를 지었기 때문이죠”라고 답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자기 혼이 담긴 농사란다. 그는 감자밭에서 풀을 매다가 소박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살고 주위가 살고 소비자도 같이 살고 온 자연도 더불어 살고 그런 거죠.” 모든 생명을 살리는, 그의 혼이 알알이 담긴 감자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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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은? 아슬아슬한 계절이다. 풀이 자라는 계절이다. 호미로 긁어 풀을 맬 수 있는 최후의 계절이다. 봄 감자 고랑을 호미로 쓰윽 긁던 4월과 달리 5월은 손으로 잡초를 쥐어 뜯어야 한다. 당연히 풀 매는 시간은 4월과 견줄 수 없이 느리기만 하다. 손목 인대가 늘어나고 손가락이 저려온다. 햇살은 따가워지고 내 몸을 숨길 넓고 푸른 잎들은 충분히 자라지 않았다. ‘에잇 이깟 감자 밭쯤이야!’ 그냥 놔두고 싶다. 풀도 생명인데 지들도 살아야지 위안하고만 싶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다. 포기하면 끝이다. 지금 뽑아내지 않으면, 전력을 다해 살아내지 않으면 모든 것이 아스라이 사라질지도 모를 5월.


나는 한때 1980년에 태어난 것이 슬펐다

열여덟 살이 되어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을 만났을 때,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를 만났을 때, 그것은 격정이 아니라 젊음이 공유될 수 없는 시대에 태어난 나 개인의 역사에 대한 슬픔이었다. 이 세계는 다가올 나의 5월을 불사르기에는 변할 것이 없는 밋밋한 계절로만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나의 5월은 축복받은 계절임을 알게 되었다. ‘사람’과 ‘가축’과 ‘자동차’가 먹을거리를 두고 서로 경쟁하는 신나는 계절. 끊임없이 재포장되는 상품들과 거짓 돈들이 세상 모든 것을 사고 팔 수 있는 화려한 계절. 나의 5월은 홍보도 없이 아주 비밀스럽게 518 확장팩을 출시하였던 것이다.


이 축복의 5월에 비밀의 확장팩을 함께 거머쥔 한살림을 만난 것은 어쩌면 행운이었다. 몇몇 고수들의 절대적인 희생과 회합을 알았던 것이 행운의 단초가 되긴 하였지만, 그것보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그 비밀을 스스로 선물 받은 24만명을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생명 시작과 죽음은 결국 흙에서부터 시작 된다

멀지 않은 곳에서 지진 해일로 많은 사람이 죽어간 것이 채 잊혀 지지도 않은 계절. 우리는 밭을 갈고 씨앗을 뿌렸다. 비밀을 풀어낼 마지막 열쇠가 이 흙 속에 숨어 있다고 추정했다. 수많은 이들의 죽음이 인재인지 아닌지 분간할 겨를도 없이 흙은 싹을 틔우고 수많은 생명을 길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아직 윤곽을 알 수 없는 희망처럼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방사능 비가 내린다고 했다. 양파 밭에 거적이라도 덮어둘까 한참을 고민해 보지만 이는 나의 5월에게 주어진 필연의 고난이라는 생각에 받아들이기로 했다. 불완전한 희망의 계절.

 

몸 축나는 생각하느라 늦잠이나 자지 말라

지금은 5월. 여전히 강은 파헤쳐지고 있고 비밀을 감추려는 이들은 원자력을 예쁘게 포장하고 있다. 하지만 나의 직업은 농부. 피켓을 들고 강으로 달려 나갈 수 없다. 몸 축나는 생각하느라 늦잠이나 자지 말라는 핀잔을 들으며 밭으로 달려 나가 풀을 매야 한다.

이 계절의 나는 1980년에 태어난 것에 무척이나 감사한다. 지금 당장, 죽을 힘을 다해 풀을 매지 않으면 건강한 먹을거리는 커녕 더불어 사는 생명살림 세상은 오지 않는 계절. 온 몸을 던져 전력으로 살아내지 않으면 그 무엇도 변하지 않는 계절. 나의 5월.

게다가 한살림 24만 소비자는 ‘나의 5월’ 비밀의 확장팩을 함께 플레이하는 또 다른 내가 아닌가. 내가 해내지 못하는 5월의 몫을 그들이 함께 풀어 나갈 것이라는 걸 알기에 2011년 나의 5월은 여전히 계속된다.
 

 

글/김단 해남 참솔공동체 생산자
*김단 생산자를 블로그에서 만나보세요. http://cafe.daum.net/Ms-Sp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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