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히지 않는 밥 한 그릇'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3.12.25 그 겨울의 점심
  2. 2013.12.24 [잊지지 않는 밥 한 그릇] 지친 마음 달래준 밥상의 기억

그 겨울의 점심

 

배동순 한살림강원영동 조합원 

 

그날도 아침부터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일기예보는 또 ‘폭설주의보’, 겨우내 엄청난 추위에 시달리고 눈 치우느라 온몸이 성한 데가 없었다. 이전까지 아파트에서 따뜻하고 편리하게 살아왔던 우리는 거의 죽을 맛이었다.

2011년 여름이 시작될 무렵. 남편과 나는 오랜 도시생활을 접고 ‘많이 놀고, 하고 싶은 공부도 실컷 하고, 일은 조금만 하며 가난하게 살되 시간은 많이 누리는 삶’을 위해 아무도 아는 이 없는 해발 800m 고지 강원도 산골로 이사를 왔다. 물 많고 봄이면 복숭아꽃이 흐드러지게 핀다는 계곡에 자리 잡은 마을 끝집이었다.

새로 이사한 집은 지하수를 식수로 쓰고 있었는데 펌프가 자주 고장 나고 소음, 녹물 때문에 마을 상수도와 연결해 쓰기로 했다. 하지만 마을 이장님의 비협조가 문제였다. 몇 번을 벼르다 찾아간 이장님 댁에서 ‘그분’을 처음 만났다. 이장님과의 이야기가 빙빙 겉돌면서 진도가 나가지 않자 자신을 새마을 지도자라고 소개한 그분이 나섰다. 낯선 곳에 뿌리 내리려면 여러모로 힘들 테니 이장님이 선처해 주라고 부탁도 대신 해주었다. 그리고는 우리집 위치를 물어보며 내일 들리겠다고 했는데 다음날 정말 찾아오셨다. 허술한 우리 살림살이를 보면서 “소꿉놀이도 아니고 아이고, 여가 한겨울 영하 30도 까지 내려가는데….” 하며 그는 혀를 찼다. 그는 자신도 귀촌 7년 차인데 처음 3년 동안은 이 동네에서 계속 살아야 하는지 회의도 들었다며 진심으로 우리를 걱정 해주었다.

그 때부터 짬짬이 우리집에 다녀가기 시작하면서 시골에 살자면 웬만한 건 본인이 다 스스로 할 수 있어야 한다며 우리가 생각만 하며 엄두를 못 내던 창고 짓기를 이끌어 주었다. 자신의 전동공구를 가져오고, ‘큰 연장을 쓸 때는 무서워하면 오히려 다친다’는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수고비를 드리려하자 ‘돈을 받으면 내 본심이 사라진다’며 극구 사양했다. 그 정성에 힘입어 우리는 겨울이 오기 전에 손수 지은 창고와 태양열난방기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상수도도 손쉽게 연결했다.

그 무섭다는 겨울이 왔다. 수도꼭지를 조금 열어두고 얼지 않게 해야 하는데 나는 물을 그냥 흘리는 게 불편해 늘 수도꼭지를 잠갔고 남편은 열었다. 잠그고 열고를 반복하다 어느 날 수도가 얼어 버렸다. 식수와 바깥 화장실이 없던 우리는 물이 많이 필요했다. 남편은 망연자실했다. 여러 시간 눈을 파헤쳐 개울로 내려가는 계단을 만들었다. 그래도 바닥은 얼어붙어 미끄러웠다. 물 긷는 일이 허리디스크가 다 낫지 않았던 내겐 힘들었다. 그래서 아주 조금씩 떠왔다. 남편이 물 긷는 일도 조마조마하게 지켜봤다. 하루 최소사용량 물 70리터 채워 놓기, 마당 쓸기, 개울로 내려가는 계단 관리하기. 그 겨울 매일의 숙제였다. 그 때 읽고 있던 지허스님의 토굴수행기 《사벽의 대화》가 큰 힘이 되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지금 여기’에 살고자 했지만 봄은 참 먼 곳에 있었고 나는 지쳐가고 있었다.

그즈음 그분이 전화로 점심 먹으러 오라고 불렀다. 아침부터 쏟아지던 눈을 뚫고 도착한 그 댁에 차려진 밥상. 지금도 생생하다. 구수한 청국장에 고추부각튀김, 산나물 장아찌와 부인이 직접 담근 명란젓, 아삭한 통무김치…. 매일 긴장의 연속이었고 식생활은 거의 연명 수준이던 내가 무장 해제되는 순간이었다. “야 임마 너 한 달은 굶은 사람 같다. 좀 천천히 먹어.” 말하는 그에게 나는 말 시키지 말라고 손을 내저으며 허겁지겁 밥을 두 공기나 먹었다. 그 밥은 내 육신과 정신의 허기까지 다 메워주는 것 같았다.

퍼붓는 눈이 빠르게 쌓이고 있어서 가지고 간 술은 한 잔도 못 마시고 급하게 일어서야 했다. 눈발이 퍼붓고 있었지만 밥의 온기가 가득했던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오지 않을 것 같던 봄이 왔다. 산골에서 한 해를 살아낸 무렵 그분이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아이처럼 엉엉 목 놓아 울었다. 그 분은 평소 즐겨가시던 계곡 작은 나무 아래 한 줌 재로 안장되었다. “이제 산이 되고 나무가 되셨을 선생님 편안하신지요? 그때 먹었던 따뜻한 밥이 제게 큰 힘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Posted by 한살림연합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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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친 마음 달래준 밥상의 기억

 

정수정 한살림고양파주 조합원

 

 

밥 한 그릇

나름 학문에 큰 뜻을 품고 일찌감치 지방 소도시로 떠난 유학생활, 고등학교 3년 질풍노도의
시간을 나는 무허가 상가주택의 맨 끄트머리 구석진 방에서 고스란히 앓으며 보냈습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된통 걸리던 감기몸살, 어느 날 혼자서 끙끙거리는 모습을 보고 간 고향 친구 지연이가 집에 가서 그 이야길 꺼냈나 봅니다. 지연이 엄마가 전화를 걸어오셨지요.
“수정아, 뭐 먹고 싶은 거 없니? 아줌마가 해가지고 갈게.”
그때의 나직하고 따듯한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합니다. 제대로 밥알을 삼키지도 못하고 있던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김치찌개요” 대답했습니다. 그날 저녁 지연이 엄마는 하얀 쌀밥에 김치찌개를 끓여 직접 내 방으로 오셨고, 엉망으로 널브러져 있던 옷가지며 책까지 말끔히 치워주고 가셨습니다. 김치찌개와 밥을 우걱우걱 퍼먹으며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감기가 말끔히 나아버린 것은 말할 나위 없었지요.

 

밥 두 그릇

그저 젊음이 버거워 마냥 방황하던 이십대 중반의 초여름, 아침 일찍 일어나 무조건 집을 나섰어요. 내가 알고 있던 것은 친구 순영이의 첫 발령지였던 경기도 이천의 한 중학교 이름뿐. 휴대전화도 없이 어렴풋한 기억을 애써 떠올리며 동서울터미널에서 출발해 버스를 두어 번 갈아타고 겨우 학교를 찾아낸 시간은 그림자가 한가롭게 누운 늦은 오후였어요.
교실 창문을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마침 수업 중이던 친구를 찾아냈고, 담벼락 아래 장미꽃 덩굴을 구경하며 친구의 퇴근시간을 기다렸지요. 그날 우린 시골의 허름한 술집에서 맥주를 실컷 마시고도 모자라 친구의 자취방에 누워 밤새 이야기를 했답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떠 보니 친구는 벌써 출근을 한 후였어요. 세수를 하고 정신을 차리니 머리맡에 놓여있는 작은 밥상과 양말 두 켤레, 그 위에 곱게 접힌 종이 한 장이 눈에 띕니다.
‘수정아, 밥 꼭 챙겨먹고 가. 국은 부엌 가스레인지 위에 있으니 데워서 먹고, 양말은 둘 중에서 맘에 드는 걸로 골라 신고 가.’
속 쓰린 아침 친구의 집에서 혼자 먹는 밥이 어찌 그리 달았을까요. 나는 편지와 양말 두 켤레를 번갈아 쳐다보며 자꾸만 웃음이 나왔습니다.


밥 세 그릇

결혼을 하고, 밥을 얻어먹는 일보다 밥을 차려 가족을 먹여야 하는 날들이 많아질 즈음 문
득 지쳐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분주한 일상 속에 나 자신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듯한 허망함에 시달릴 즈음, 내게 한살림을 알게 해 준 한 선배가 있습니다. 10년 전 직장에서 처음 만났을 때, 가정과 일터를 오가느라 분주한 선배의 모습은 한없이 커 보이긴 했지만 그만큼 숨 가쁘게 느껴지지도 했습니다.
“수정 씨, 집으로 밥 한 번 먹으러 와.” 입버릇처럼 하던 선배의 말이 그제야 떠올랐어요.
처음 찾아간 선배의 집에서 그가 손수 준비한 따듯한 밥상에 마주앉았지요. 작은 무쇠가마솥에 갓 지은 잡곡밥, 된장으로 조물조물 무쳐낸 나물, 말갛게 끓인 다시마 북엇국, 대낮의 막걸리 한 잔까지. 투박한 질그릇에 담긴 점심 밥상은 고향집 엄마의 향기와 다르지 않았어요. 그 후로 지친 마음을 둘 데 없어 심란할 때면 슬그머니 선배의 밥상을 찾는 염치없는 후배가 되어버렸지요.


이제, 마음이 힘든 누군가를 위해 내가 손수 밥상을 준비할 때가 된 것 같네요. 내가 차린
작은 밥상도 누군가의 지친 마음을 쉬어갈 수 있게 해준다면 한없이 기쁘겠어요!

 

 

 


Posted by 한살림연합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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