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임락경
어릴 적 부모님께 곡식을 소중히 하지 않고 함부로 하면 천벌 받는다는 말씀을 들으며 자라왔다. 지금도 허리를 꺾고 마당에 흩어진 곡식을 낱낱이 손으로 줍고 있는 어르신들을 볼 때면 성스럽게까지 느껴진다. 어릴 적에는 종일 다 주워 모아도 얼마 되지 않는데 왜들 저러실까 싶기도 했다. 내가 농사를 지어보니 고생해서 심은 모가 잘 자라 꽉찬 알곡으로 여무는 모습은 장성한 자식마냥 대견스럽기까지 하다.
곡식은 곡식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주곡과 잡곡으로 분리했고, 주곡을 쌀로 삼고 살아왔다. 잡곡이 주곡인 나라도 있고, 우리나라도 지방에 따라 달랐다. 산간지역은 논이 적어 쌀이 귀했고, 제주도 역시 좁쌀이나 기장이 주식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 강원도 역시 옥수수가 주곡이었다.
나는 평야에서 자랐어도 집이 가난해서 주식이 보리밥, 좁쌀밥이었고 쌀밥은 특식이었다. 지지리도 못살던 1972년, 폐결핵 환자들과 고아들과 같이 살 때였다. 그렇게 기막힌 세상을 어떻게 살아냈을까, 잘 믿기지 않겠지만 그때는 쌀이 귀했던 시절이라 쌀 대신 보릿겨와 두부집에서 콩비지를 사다 먹었다. 미국에서 원조물자로 나온 강냉이가루로 온 가족이 끼니를 때우곤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게 가축사료용이었다. 오죽했으면 14살 된 어린 여동생은 찬송가를 부를 때면 “내 일생 소원은 늘 쌀밥 먹고서 배부르게 살아보기 원합니다.”라고 간절히 가사를 바꿔 불렀을까….
그랬다. 쌀은 모든 생활의 기본이었고, 오롯한 피붙이나 마찬가지였다. 1960년대 초반까지 쌀이나 벼를 가지고 토지나 집을 매매했었다. 논 한 마지기에 쌀 20가마. 어떤 산골짜기 논은 6가마였다. 쌀이 곧 금융이었던 셈이다. 어릴 적 집이 가난해서 정월 무렵이 되면 식량이 바닥나곤 했다. 어머니께서 친척아주머니 댁에 가셔서 5월 달에 모내주기로 하고 미리 품삯을 받아오셨다. 하루 품삯이 쌀 1되, 즉 400g이었다.
머슴 새경도 쌀이었다. 종제도가 일제 말에 없어지고, 광복 이후에는 머슴 제도로 바뀌었다. 집사처럼 모든 일을 처리하고 무엇보다 농사일을 도맡아 하면서 다른 머슴들까지 통제하는 상머슴의 1년 새경이 12가마였다.
1969년, 군을 제대하고 이곳 강원도에서 살았다. 제사 때가 되면 이웃집에서 떡제사냐 밥제사냐 묻는다. 쌀이 적어 떡과 밥을 같이 할 수 없고, 제사 때 찧어 떡을 해서 제사를 지내느냐 밥을 해서 지내느냐를 결정지었다 .
유기농 외국쌀이 아무리 들어온다 할지라도 유통과정에서 쉽게 변질이 안 된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보관이나 유통과정에서 소홀히 하면 자칫 변질될 수 있는 살아있는 국산 유기농 쌀과 비교해 보면 무슨 뜻인지는 말 안 해도 잘 알 것이다.
신토불이란 한마디로 ‘제철에 제 땅에서 난 먹을거리를 먹자’는 것이다. 제 땅, 제 하늘 아래서 난 음식을 먹어야 몸의 기 순환이 상충이 안 되는 것이다. 그 가운데 쌀이야말로 대표적인 신토불이 메신저인 셈이다. 신토불이 원리에서 우리 쌀을 다시 바라보면 좋겠다.
글을 쓴 임락경 님은 강원도 화천 ‘시골집’에서 장애인들과 오랫동안 같이 생활했던 경험으로 《먹기 싫은 음식이 병을 고친다》, 《흥부처럼 먹어라 그래야 병 안 난다》, 《돌파리 잔소리》 등의 건강 관련 책을 냈습니다. 매년 ‘임락경의 건강교실’을 열어 건강한 먹을거리와 삶에 대해 나누고 있습니다. 그동안 화천군친환경농업인연합 창립회장, 북한강유기농연합 초대회장, 정농회 회장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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