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서형숙 한살림 조합원
작년 박재일 회장님은 병상에 누워 고통스러운 듯 찡그린 채 두 팔을 들어 휘저었는데 어찌 보면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는 듯했다. 말을 걸어보았다. “회장님, 이 세상에서 좋은 사람 많이 만나고, 좋은 것 많이 보고, 좋은 것 많이 먹고, 좋은 일 많이 하고 한 바탕 참 잘 노셨지요? 저희들도 더불어 잘 놀았어요!” 아는 듯 모르는 듯 대꾸가 없었다. 회장님은 1994년에 교통사고로 허리를 다쳐 오랫동안 병석에 있었으나 툭툭 털고 일어났고 암 수술을 하고도 건강을 되찾아 씩씩하게 칠순을 맞으셨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렇게 이어질 줄 알았는데 그게 마지막이었다.
박재일 회장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90년 한살림 총회에서였다. 그 때는 한살림 사람이 아니셨고 협동조합 중앙회 회장이셨다. 곧 한살림 전무이사로 오게 되면서 부터 가까이 지냈다. 내가 한살림 평회원으로 돌아오던 2005년까지 같은 임원으로 매달, 매주 사실 초기에는 이삼일이 멀다하고 같이 만나 큰 살림, 하나 되는 한살림을 이야기하며 만들어갔다. 참 재미있었다. 사단법인 부회장이 되면서는 바깥일은 회장님이 하시고 소비자 활동 모두와 생산자, 실무자들의 잡다한 일, 안살림은 내가 꾸렸다. 회장님은 걱정거리가 생기면 밖으로 불러내어 속내를 은근히 드러내며 안타까워하셨다. 회원 자주 매장이 너무 개인 사업처럼 느껴질 때, 실무자들 간 알력이 생겨 대치될 때... 그래도 되돌아보면 회장님은 언제나 느긋하셨다.
회장님은 성을 잘내지 않았다. 1992년 불거진 생산자 문제를 박재일 전무 책임으로 돌려 해임 안이 나와 이상국 상무와 실무자협의회 회장이 우리 집을 찾는 등 모두 다급한데도 회장님은 의연히 ‘그냥 내가 책임지고 물러나지요’ 했다. 어지간한 일에 서두르거나 남을 비방하거나 자신을 재지 않았다.
회장님은 늘 웃으셨다. 소리 내지는 않았으나 세상이 환해질 만큼 이를 다 드러내고. 어려운 시절 이야기를 할 때도 그저 웃으셨다. 장가들러 갔던 것이 훗날 아이들을 낳아 데리고 처가에서 나오도록 긴 고난과 피신의 세월이었다는 이야기 할 때도 그랬다. 순수한 사모님, 소명한 다섯 따님과 사신 분이라 그랬을까? 1998년 일본 그린코프 연합 10주년 행사에 함께 참석했는데 저녁에 ‘내일 입을 옷 좀 다려드릴까요’ 하고 여쭈니 이미 주름 펴지라고 물 뿌려 욕실에 걸어두었다고 아이처럼 웃으셨다. 의외였다.
회장님은 감성적이셨다. 실무자-윤희진 상무-들이 임신을 하게 되면서 나는 모두의 엄마로서 사무실 내 금연운동을 개인적으로 벌이고 있을 때였다. 회장님께도 사무실 내에서는 피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완곡히 말씀드렸다. 빙그레 웃으시더니 얼마 후 “나, 6개월 됐어요!” 그 날 이후 실천하고 있는 금연 자랑이셨다. 업혀 한살림에 오던 두 돌, 네 돌 우리 아이들이 자라 대학에 들어가자 가장 먼저 전화로 축하를 하던 회장님이셨다. 어찌나 기뻐하시는지 전화기 너머 웃는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2006년 문을 연 ‘엄마학교’를 보러 오셔서는 여길 보고도 웃고, 저길 보고도 감탄이셨다. 맛있는 점심도 함께 먹고 가장 필요한 게 뭐냐 물으시고는 스테인리스 전기 주전자를 선물로 사 보내셨다.
회장님 회갑 때 드린 말씀이 떠오른다. ‘회장님은 욕심이 없어서 또 욕심이 많아서 좋아요. 돈 욕심은 없고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욕심이 있잖아요.’ 회장님은 한 평생 욕심대로 사셨고 지금은 우리들의 한살림으로 살아 있다. 넉넉한 미소로 우리를 대하던 환한 얼굴이 한살림에 그대로 묻어있음에.
글을 쓴 서형숙님은 1989년 한살림운동을 시작해 한살림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한살림의 마음으로 아이를 기른 경험을 다른 엄마들과 나누기 위해 ‘엄마학교’를 열고,《엄마학교》, 《엄마 자격증이 필요해요》 같은 책을 펴내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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