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여름의 타는 듯한 땀방울. 풋고추 한 소쿠리 따와서 날된장에 찍어 베어 문다. “아삭” 풋풋한 내음과 동시에 입 안 가득 전해지는 알싸함이 화끈하면서도 시원하게 몸을 자극한다. 고추는 따뜻한 기후를 좋아하는 고온성 열매채소이다.
뜨거운 한여름 밤, 꿈속에서도 마음은 고추밭에 가있다
빛깔에서부터 뜨거운 정열이 느껴지는 고추의 일생은 땅이 녹아 기지개를 펼 때부터 시작된다. 땅에 맞는 고추씨를 채종하여 모판에 뿌린다. 우리나라에서 재배되는 대부분의 고추씨 종자는 외국에서 수입된 것으로 살균처리 되었기에 물에 불려 소독 후 사용하기도 하지만 한살림 생산지에서는 가급적 자가 채종한 씨앗을 고집한다. 씨를 뿌린 후 싹이 트고 모판위에서 뿌리가 강하게 자라날 때까지 고추모는 아기 돌보듯 매일 쓰다듬어주고 공을 들여야 한다. 모종농사가 '농사의 절반'이기 때문이다.
고추모가 튼실하게 자라나면 이제 넓은 대지에 홀로서기를 한다. 애지중지 키워온 농부는 이제부터 가슴을 졸인다. 본밭에 심어놓은 고추모들이 비바람에 쓰러질까 걱정스런 마음에 말뚝을 세우고 포기사이로 줄을 친다. 고추모와 함께 자라는 풀들을 뽑아야하기에 이때부터 농부는 밭에 들어가 기어 다니며 김을 매며 고추모의 성장을 돕는다.
가장 더운 때에 고추밭에 들어가 기어 다니노라면 성미 급한 마음도 어느덧 생명의 모심을 배우며 차분히 다듬어진다. 여름이 오고 장맛비가 내리고 나면 꿈속에서도 마음은 고추밭에 가있다. 습한 것을 싫어하는 고추들은 이때부터 탄저병과 역병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땅에서 튀어 오르는 빗물에서 시작한다는 탄저병과 바람을 타고 옮겨 다니는 역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결국은 하늘을 우러러본다. 석회보드도액이나 집에서 만든 식초, 막걸리, 녹즙을 섞어 뿌려보지만 일반농사에서 쓰여지는 독극물로 만든 화학 농약만큼 효과가 있을 리 없다.
올해 유독 농부의 눈물을 쏙 빼놓는 고추농사
이토록 애달픈 시간이 흘러 가을바람이 불어올 무렵 드디어 붉은 고추를 딴다. 풋고추는 꽃이 핀 뒤 15일부터, 붉은 고추는 꽃이 핀 뒤 45일이 지나면 첫 수확을 한다. 붉은 고추가 고춧가루로 한살림 조합원의 손에 닿기까지 또 다른 손길이 필요하다. 붉은 고추를 잘 씻은 다음 볕에 말린 후 건조기에 넣는다.시종 태양에 고추를 말리면 좋겠지만 일조량이나 일손부족으로 어려운 형편이다. 대신 건조기에 들어가더라도 고온건조로 인한 영양소파괴를 최소화하기 위해 55℃이하에서 서서히 말린다. 이러한 기준을 지키기 때문에 한살림 건고추의 고추씨는 70%이상 다시 발아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고추를 고추장에 찍어먹는 나라, 각종 요리양념에 기본이 되는 고추가 빠진 밥상은 상상하기 힘들다. 주식에 가까운 고추를 생산하는 일은 밥상을 지키고 책임지는 일이기에 자부심이 크지만, 고추농사를 짓다보면 매운맛과 단맛을 마음으로 느끼게 된다. 고추가 건강하게 잘 자라면 흥겹지만 병이라도 번지면 눈물을 제일 많이 쏟게 되는 작물이다. 그렇더라도 다시금 고추농사를 짓는 이유는 한국음식에 변혁을 일으킨 고추가 농업살림의 또 다른 변화를 이루리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올해는 잦은 비와 이상기후로 고추생산지 곳곳에서 탄저병과 역병 소식이 일찍 들려온다. 자식같이 길러온 고추가 타 들어갈 땐 생산자마음도 함께 탄다. 좋은 볕으로 빛깔 좋은 고추가 무사히 조합원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손 모아 기도하는 심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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