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반 잔의 물을 보고 반이나 남았다고 말하는 낙관론이 있는가하면 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비관론이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을 기계로 보는 기계론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세상을 바라보는 대부분의 시각이 기계론적인 세계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케이지 닭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거기에 있는 닭은 살아있는 생명이라기보다는 원료를 투입하면 제품이 나오는 공장의 기계나 마찬가지입니다. 주는 대로 먹고 원하는 만큼의 계란을 생산하는 기계처럼 여기니까 움직일 필요도, 사랑을 나눌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오로지 암탉만 키우고 늙어서 산란율이 떨어지면 폐사 시키는 거지요. 들인 비용에 비해 얼마나 많은 이익을 내느냐에만 관심이 있기에 그들의 본성이나 가치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제초제나 농약을 쓰는 농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땅은 생명을 키워내는 어머니 대지가 아니라 질소, 인산, 칼륨 등 3대 영양소를 투입하면 사람이 필요로 하는 곡식과 채소를 내 놓는 도구일 뿐입니다. 들풀이나 풀꽃은 농사의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잡초로 생각하고 제초제로 아예 씨앗까지 없애려고 합니다. 이런 생각 안에는 땅 속에 깃든 미생물의 상호작용이나 갯벌이 품고 있는 수많은 생명체의 소중함, 풀벌레의 노래나 새의 날개 짓이 주는 아름다움은 들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이렇게 온 우주의 모든 생명들을 우리의 탐욕을 위한 소모품이나 도구로 여기는 생각이 굳어져 이제는 사람까지도 그런 범주 안에서 생각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기 보다는 갖고 있는 능력이나 이윤창출의 도구로만 생각합니다. 어느덧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개인은 시장에서 보다 높은 값을 받기 위해 스스로를 갈고 닦아 상품화하고 사회는 그것을 부추기는 각박한 곳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기계론적 세계관, 전일적인 생명체를 낱개의 요소로만 분석하는 요소론적 세계관이 인간의 탐욕을 충족시키지 위해 산업문명 체제를 만들었습니다. 생명을 생명으로 여기지 않는 일이 시작된 것이지요. 서구에서 시작된 생명경시, 물질만능의 물결이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문화와 사고를 밀어내는 것을 우려한 선각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살림선언>을 통해 생명과 기계의 차이점을 설명하면서 그 기준을 정신이라고 말합니다. 정신의 가장 중요한 특성이 창조성이기 때문에 생명은 스스로 진화하며 열린 존재이고 전체의 한 부분을 이루면서 순환, 소통하는 유연한 질서를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타율적으로 만들어지고 경직, 폐쇄된 체계인 기계가 갖지 못한 이러한 정신이 우주의 모든 실재에 들어있는 생명의 근원적인 활동이라고 주장합니다. 생명을 모시고자 하는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생각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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