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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 발자취/살리는 말

<살리는 말> 경물

 

윤선주 한살림연합 이사

 

우리 집에서는 35년 전 돌아가신 아버님이 쓰시던 손톱깎이를 지금도 씁니다. 손에 익어 편하고 멀쩡하다고 어머님이 항상 챙기셨거든요. 해 잘 드는 마루 끝에 앉아 손톱정리를 하시던 부모님 생각이 납니다. 아마 어느 집이나 물려받거나 오래 전에 장만해서 잘 쓰고 있는 물건들이 있을 거예요. 결혼 때 혼수로 마련한 책장이나 첫 월급으로 산 좋아하는 작가의 책, 혹은 부모님이 쓰시던 물건들은 우리를 훌쩍 그 때로 데려가 늘 기운을 북돋아줍니다.

비닐봉지나 종이행주는 한 번 쓰고 버리는 1회용이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씻거나 말려서 몇 번이고 다시 씁니다. 점점 그 숫자가 줄어드는 것 같지만 여전히 편한 1회용 대신 손수건, 장바구니, 걸레 등을 쓰는 사람들도 많이 보입니다. 우리 부모님을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낡은 러닝셔츠는 일단 엄마의 속옷이 되었다가 뽀얗게 삶아 부엌의 행주로 또 몇 달 지낸 후 걸레로 끝을 맺었지요. 어린 마음에 저리 얇은 천이 참 오래도 버틴다 싶습니다. 또, 이렇게 더운 여름이면 돌아가신 어머니가 즐겨 덮으시던 삼베이불로 수월하게 잠이 들기도 합니다. 수 백 년 전 고분에서 수의가 완벽한 모습으로 출토되는 것을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오래 사는 물건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요즈음엔 고치거나 기워서 다시 쓰는 것 보다는 새로 사는 일이 더 많아 보입니다. 심지어 새로 입주하는 아파트를 완전하게 바꾸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여든을 넘긴 연세에도 간단한 옷을 만들어 입으셨던 어머니는 바느질 하실 때면 피난길에 보리 두 말과 바꾼 싱거미싱을 꼭 헤어진 단짝이라도 되는 듯 그리워하셨지요. 시집 올 때 꽃을 담아 갖고 오셨다는 작은 단지를 바라보시던 눈길에는 19살 어린 신부의 꿈이 담겨있었고 혼수로 짜온 비단을 손으로 쓸어보실 때면 마치 그 시절의 당신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노라면 자식이나 남편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고민들을 고스란히 함께 나누는 친구를 대하는 것이 애잔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오래도록 함께 한 물건은 쓰는 이의 염원이나 생각, 걱정과 근심이 그대로 투영되어 분신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옆에서 보기에도 저들은 보통사이가 아니구나 싶은 경우도 많습니다.

나이가 드니까 마음을 나누고 위로를 받는 대상이 꼭 사람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는데 자기 주변에 그런 사물들이 많다면 참 좋겠지요? 아마 그래서 우리 선조들이 문방사우(文房四友)라는 말을 쓰고 내 벗의 명단에 바람, 물 등을 꼽은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연과 사물에 혼이 있다고 믿고 그 본성을 잘 살려 오래도록 아껴 쓰던 시절에는 어느 것도 함부로 버려지는 일이 없었습니다. 물론 쓰레기라는 말도 없었고 멀지않은 미래에 온 나라가 각종 쓰레기로 몸살을 겪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겠지요. 대량 생산과 소비, 폐기의 결과로 ‘쓰고 버리는 시대’가 된 지금의 생태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 전통적인 삶의 지혜인 경물(敬物)의 윤리를 다시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글을 쓴 윤선주 님은 도시살이가 농촌과 생명의 끈으로 이어져 있다는 믿음으로 초창기부터 한살림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지금은 한살림연합 이사로 일하며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이웃들과 나누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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