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힘든 일을 마치고 밥을 먹을 때 고영민 시인의 시 <공손한 손>을 떠올린다. “추운 겨울 어느 날 /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다 / 사람들이 앉아 / 밥을 기다리고 있었다 / 밥이 나오자 / 누가 먼저랄 것 없이 / 밥뚜껑 위에 한결같이 / 공손히 / 손부터 올려놓았다” 고영민, 시, <공손한 손>, 전문
또, 나는 생일이거나 기제사가 있는 특별한 날 밥을 먹을 때, 동학에서 나오는 “밥이 하늘이다”라는 말을 떠올리기도 한다. 사람의 한평생이 ‘밥’과 연관되어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숟가락을 엎어놓으면 그 형상이 무덤 같다. 생사의 거리가 이만큼 가깝고 멀다. 숟가락을 엎는 날 죽음이 마중 오리라. 밥사발을 엎어놓으면 이것 역시 그 형상이 무덤을 닮았다. 죽음이란 밥사발을 엎어놓는다는 뜻이리라.
옛말에 ‘얼굴 반찬’이라는 말이 있다. 밥은 혼자먹기보다 여럿이 둘러앉아 먹어야 맛이 있다는 말이다. 왜 안 그렇겠는가? 다른 건 몰라도 밥만큼은 여럿이 둘러앉아 흥성흥성 즐기는 것이 제격이요, 제맛이다. 혼자 먹는 밥처럼 청승맞은 일도 없다. 예전의 밥상들은 대개가 두레 밥상인 게 많았다. 둘러앉아 먹으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요즘 들은 사각인 밥상이 더 흔하다. 둘러앉고 싶어도 앉을 수가 없다.
‘밥은 하늘이다’라는 말처럼 ‘밥’은 신성한 것임이 분명하지만 밥을 얻는 과정은 저마다 다르다. 신성한 뜻을 지닌 ‘밥’을 얻기 위해 성실, 근면, 정직하게 밥을 구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에 자기 자신과 이웃을 속이고 심지어 타자에게 눈물과 고통을 안기거나 떠넘긴 대가로 구차하고 비굴하게 구하는 밥도 있다. 밥에도 값과 격이 있듯이 밥에 이르는 과정에도 값과 격이 있는 것이다. 한평생을 살면서 먹는 밥인데 기왕이면 밥 앞에 부끄러운 얼굴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가축이 사료를 삼키듯, 기계가 연료를 채우듯 밥을 취한다면 그는 밥 앞에 죄를 짓는 자이리라. 밥을 구하는 과정에 부끄러움이 적어야 밥의 격과 값이 빛날 수 있다.
밥은 그동안 내게 이러저러하게 삶에 대한 사유를 안겨다 주었다. 밥은 내 생활의 신앙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처럼 귀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는 ‘밥’이 최근 들어 모욕과 수난을 겪고 있어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정부가 밥쌀용 쌀을 수입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나랏일을 하는 분들은 곧잘 효용성을 들먹일 때가 많다. 이때 동원하는 논리가 비교우위론이다. 가령 비싼 공산품을 내다 팔고 값싼 농산품은 외국에서 사다 먹는 게 유리하다는 논지가 그것인데 이것은 매우 위험한 논리다. 농산품은 상황 변화에 따라 생활의 무기가 될 수 있다. 오늘은 싼값에 거래되다가도 내일 가서 열 배 스무 배 천정부지로 값이 뛰어오를 수 있는 게 외국의 농산물이다. 손해만 보아온 농사꾼이 농사를 저버린 상태에서 예의 우려가 무서운 현실로 닥쳐온다면 미래의 국민이 그 손해를 고스란히 감당해야만 하는 것이다. 농사는 모든 산업의 토대라 할 수 있다. 당장 효용성만을 고집하여 나라 살림의 근간을 흔들고 있는 그들로 인해 우리의 미래가 암담해지는 일이 없도록 미연에 이를 막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개인의 일이 아니라 나라 전체의 일이기 때문이다.
글을 쓴 이재무 시인은 1983년 무크지 <삶의 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길 위의 식사>,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 등의 시집을 펴냈으며, 현재 대학에서 시창작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주식회사 <천년의 시작>의 대표 이사로 계간지 <시작>을 통해 시와 대중을 잇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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