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설 명절 동안 대형마트에서 판매된 포도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칠레산이 아니라 100% 페루산이었다. 2년 전부터 페루산 포도가 미국산(9~12월)과 칠레산(3~6월)의 중간을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작년 말 <꽃보다 청춘>이라는 방송을 통해 만났던 머나먼 남미의 페루. 그런데 요즘은 포도를
통해 페루를 가까이 마주할 수 있다.
그럼 페루에서 포도가 재배되는 곳은 어디일까. 지난 1월 페루의 포도농장을 다녀 왔다. 페루의 포도산지는 2천 년 전 사람들이 사막 위에 그린 것으로 알려진 나스카 라인 부근의 사막지대인 이카(Ica) 지역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건조하다고 알려진 페루와 칠레 북부의 해안사막지대. 황량한 모랫빛 산들 사이에 거대한 포도농장이 자리하고 있다. 칠레의 과일 산업자본이 들어와 페루 사람들을 노동자로 고용해 대농장을 경영한다. 안데스 산맥의 눈 녹은 물이 지표수와 지하수로 흘러내려 와 이를 관개해 농사가 가능해졌다. 그런데도 근본적으로 물이 매우 귀한 지역이다.
1990년대 후반 페루 역시 외채문제로 외화획득산업을 고심하던 중, 세계은행이 제안한 아스파라거스 수출농업을 사막 지역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머지않아 아스파라거스 수출국 1위에 오른다. 2010년경부터는 수출용 포도가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막에서 행해지는 관개농업은 자연적으로 생성되는 속도보다 더 빨리 물을 고갈시킨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안데스의 눈 녹은 물이 점점 줄어드는 것도 기여했다. 이카 지역의 오아시스들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지역주민들이 생계용으로 농사짓고 마시는 물은 말라붙기 시작했다.
이미 2010년 영국의 언론은 영국이 수입하는 페루산 아스파라거스의 물 발자국 문제를 제기했다. 우리가 무역하는 농축산물을 생산하는데 들어가는 물의 양을 계산하여 그것이 생산지의 환경에 얼마나 부담을 미치는지 살펴보는 방법이다. 물이 부족한 남미나 아프리카의 개발도상국들이 수출용 원예작물을 생산하는데 엄청난 물을 사용하고, 이를 수입해 먹는 선진국 소비자들이 이들 나라의 물 고갈에 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농지와 노동력이 저렴한 제3세계 개발도상국들에서 원예농업이나 축산업, 양식업이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어 2천 년대 들어 급속하게 퍼져나가고 있다. 선진국에서나 하던 산업적 농업방식이 이젠 노동과 자연의 착취를 통해 생산비가 저렴한 제3세계 국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산업적 농업방식의 자연 착취는 비단 물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단작과 화학물질 사용으로 인한 생물다양성과 토양, 생태계의 질 악화 문제는 더는 용인할 수 없을 정도로 전 세계적으로 심각한 상태다. 그리고 자연의 착취는 노동의 착취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다.
페루와 유사한 자연조건을 가진 미국 캘리포니아의 농업이 최근 지구온난화로 인한 심각한 가뭄으로 150년 만에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캘리포니아 물의 80%는 농업에 쓰이는데, 이곳에서 생산된 오렌지, 아몬드, 포도 등의 농산물은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로 수출된다. 미국이든 영국이든 남미든 아프리카든 산업적 수출농업이 물 고갈의 원흉이고, 로컬푸드의 활성화가 문제 해결의 근본책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가는 이유다.

 

글을 쓴 허남혁 님은 (재)지역재단 먹거리정책·교육센터 센터장으로 로컬푸드, 학교급식, 도시먹거리정책 등 생산자와 소비자가 가까워질 수 있는 대안먹거리운동과 정책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내가 먹는 것이 바로 나>(2008)가 있습니다.

 

 

Posted by 한살림연합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