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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지에서 온 소식/살리는 이

밥의 마음으로 벼 키우는 농부 <충남 예산 자연농회> 김수구·김경희 생산자 부부


밥의 마음으로 벼 키우는 농부

충남 예산 자연농회 김수구·김경희 생산자 부부


정미희 · 사진 문재형 편집부

 

 

밥은 늘 상에 오르지만 주인공으로 대접받진 못하는 느낌이다. 일품요리 옆에 으레 따라가지만 맛 자체가 그리 주목받지는 못한다. 그러나 밥의 진면목은 오히려 바로 그것일지 모른다. 입안에서 화려하지는 않지만, 다른 어떤 음식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존재감을 지키는 그 맛 말이다. 그런 밥의 모습을 닮은 사람이 있다. 충남 예산에서 햇수로 41년째 벼농사를 짓고 있는 김수구 생산자다.

 예부터 비옥하기로 이름난 예당평야지대는 벼농사를 많이 짓는 곳이다.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열여덟 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벼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이 사람은 보통 농사꾼하고는 달라요. 계속 실험하고, 연구하고, 농사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사람이에요.” 아내 김경희 생산자의 말 그대로 그의 벼농사 이력은 끝없는 도전의 역사라 할 만하다. 서울에서 유학을 하던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다시 예산으로 돌아왔다. 도시생활에 실망을 해오던 터라 낙향을 결심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주위에서는 학업을 마저 마치라고 권유했지만, 그는 고향에 돌아와 아버지가 짓던 4천 평 논농사를 도맡아서 이어갔다. 어릴 적부터 눈으로 몸으로 익힌 농사일인지라 마을 어른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금세 일을 익혔지만 그는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남들과 똑 같은 농사는 짓지 않았다. 남들이 농약 20번 칠 때, 절반만 치면서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는 제대로 된 논농사를 모색했다.

 “손 모내기만 하던 시절이었는데 1972년에 이앙기가 처음 들어왔어요. 자라는 것을 보니 기계로 심은 모가 손으로 심은 모보다 좋았죠. 그래서 3년 만에 이앙기가 널리 보급됐는데, 문제는 기계모가 손모보다 길이가 짧아 물을 깊게 못 대니 논이 풀 바다가 된다는 거였어요. 못자리처럼 풀이 나요. 그래서 사람들이 제초제를 쓰게 되었지요.”

 사람에게도 땅에게도 해로운 제초제를 쓰는 대신 다른 대안을 찾던 그는 1990년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그 당시 한살림생산자협의회(현 한살림생산자연합회) 김영원 회장에게 한살림생산자 교육을 받고, 그를 포함한 인근의 다섯 농가가 무농약 벼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1991년에 첫 수확을 했지만 판매는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들인 품과 노력은 엄청났지만 그 가치를 이해해주는 사람은 드물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함께 무농약 농사를 실천하던 생산자 공동체는 와해됐다. 2년간 판로를 찾지 못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무농약 농사를 계속했다. 1996년에는 예산군 최초로 오리농법을 도입해 꽤 그럴 듯하게 농사가 되어갔는데, 갑작스레 너구리들이 습격해 오리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그 참담한 죽음 앞에서 그는 오리농법을 포기하고, 이듬해 태평농법을 시도했다. 벼와 보리를 이모작 하면서 볏짚 등 전작물의 잔여물을 땅에 덮어 퇴비도 되게 하고 잡초도 막아내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이 농법은 논에 물을 일정한 깊이로 계속 대줘야 하기 때문에 물 수급이 원활해야 하는데, 지역 조건과는 잘 맞지 않아 결국 실패했다. 그 사이 우루과이라운드와 IMF를 지나면서 친환경농산물의 판매는 갈수록 더 어려워졌다.

 김수구 생산자는 앞이 안보이게 어려웠던 시절을 회상하면서도 “농사꾼은 원래 속앓이를 하는 거예요. 몇 번 실패가 있었지만 크게 낙담하지는 않았어요.”라고 담담히 말했다. 그런 남편을 지켜보는 아내의 심정은 어땠을까. “제가 이 사람을 아니까요. 누가 말린다고 들을 사람도 아니고, 자기가 해보고 싶을 때까지 해야 그만두는 사람이니까 그냥 기다렸지요.” 그런 아내의 믿음을 위로하듯 1999년에는 한살림 생산자가 되어 예산 자연농회라는 이름으로 유기농 쌀을 생산해 출하하기 시작했고, 2000년에 시작한 우렁이농법도 마침내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우렁이농법은 1992년에 충북 음성 최재명 생산자가 처음 시작한 농법으로, 1995년 생산지를 견학했었지만 반신반의하며 시도하지 않았던 터였다. 그러나 부안 김병국 생산자의 권유로 한 필지에 실험을 했고,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그 의 결실을 보고 예산 자연농회 회원들 모두 우렁이 농법을 시작했고, 공동체는 점점 활기를 띄어갔다. 그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이듬해에는 녹비 작물로 헤어리베치를 심는 농법을 3년간 실험한 끝에 2005년에야 비로소 성공을 거뒀다. 헤어리베치는 콩과식물로 벼 재배에 필요한 질소를 공급해주는 역할을 하는데, 잘 활용하면 다른 화학비료나 농약 없이도 농사를 지을 수 있다고 한다. 농을 섞어 가며 그간의 이야기를 담담히 풀어놓는 그의 모습에서 쌀을 생산하기까지 농민의 손길이 여든여덟 번이 필요하다는 말이 실감났다.

  도시의 여느 직장인이라면 벌써 정년퇴직을 했을 나이, 그는 여전히 마을에서 궂은일을 도맡는 청년층이고 그의 아내는 여전히 새댁으로 불린다. 마을에서 함께 농사를 짓는 분들의 나이가 대부분 70대인 탓이다. 스물여덟에 시집 온 후 만년새댁이라며 웃는 그의 아내 김경희 생산자는 벼농사 지역에는 새로 농사를 지으러 들어오는 사람이 없다며 걱정을 풀어놓는다. “우리나라가 지금 식량자급률 27% 정도를 유지하는 건 쌀 때문인데, 농사를 지을 2세들이 없어 걱정스러워요. 젊은 사람들은 특수작물로만 가고 벼농사를 지을 생각을 안 해요. 쌀은 돈으로 접근하면, 안되지요.” 후계농을 구할 수 없는 농촌 현실이 이들의 큰 근심거리다. 이를 위해 김경희 생산자는 활발한 지역 활동을 하며 귀농할 사람들을 찾는가하면, 김수구 생산자는 예산지역 6개 학교에 친환경인증쌀을 공급하며 젊은 회원들이 유기농으로 전환하도록 돕고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식탁 위 쌀밥의 자리, 초록이 넘실대는 논에 농부의 자리가 더 귀하게 느껴진다. 참, 고맙습니다. 매일의 밥, 감사히 먹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