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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살림 물품 써보니 어때요?/독자가 쓰는 사연

그 겨울의 점심

그 겨울의 점심

 

배동순 한살림강원영동 조합원 

 

그날도 아침부터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일기예보는 또 ‘폭설주의보’, 겨우내 엄청난 추위에 시달리고 눈 치우느라 온몸이 성한 데가 없었다. 이전까지 아파트에서 따뜻하고 편리하게 살아왔던 우리는 거의 죽을 맛이었다.

2011년 여름이 시작될 무렵. 남편과 나는 오랜 도시생활을 접고 ‘많이 놀고, 하고 싶은 공부도 실컷 하고, 일은 조금만 하며 가난하게 살되 시간은 많이 누리는 삶’을 위해 아무도 아는 이 없는 해발 800m 고지 강원도 산골로 이사를 왔다. 물 많고 봄이면 복숭아꽃이 흐드러지게 핀다는 계곡에 자리 잡은 마을 끝집이었다.

새로 이사한 집은 지하수를 식수로 쓰고 있었는데 펌프가 자주 고장 나고 소음, 녹물 때문에 마을 상수도와 연결해 쓰기로 했다. 하지만 마을 이장님의 비협조가 문제였다. 몇 번을 벼르다 찾아간 이장님 댁에서 ‘그분’을 처음 만났다. 이장님과의 이야기가 빙빙 겉돌면서 진도가 나가지 않자 자신을 새마을 지도자라고 소개한 그분이 나섰다. 낯선 곳에 뿌리 내리려면 여러모로 힘들 테니 이장님이 선처해 주라고 부탁도 대신 해주었다. 그리고는 우리집 위치를 물어보며 내일 들리겠다고 했는데 다음날 정말 찾아오셨다. 허술한 우리 살림살이를 보면서 “소꿉놀이도 아니고 아이고, 여가 한겨울 영하 30도 까지 내려가는데….” 하며 그는 혀를 찼다. 그는 자신도 귀촌 7년 차인데 처음 3년 동안은 이 동네에서 계속 살아야 하는지 회의도 들었다며 진심으로 우리를 걱정 해주었다.

그 때부터 짬짬이 우리집에 다녀가기 시작하면서 시골에 살자면 웬만한 건 본인이 다 스스로 할 수 있어야 한다며 우리가 생각만 하며 엄두를 못 내던 창고 짓기를 이끌어 주었다. 자신의 전동공구를 가져오고, ‘큰 연장을 쓸 때는 무서워하면 오히려 다친다’는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수고비를 드리려하자 ‘돈을 받으면 내 본심이 사라진다’며 극구 사양했다. 그 정성에 힘입어 우리는 겨울이 오기 전에 손수 지은 창고와 태양열난방기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상수도도 손쉽게 연결했다.

그 무섭다는 겨울이 왔다. 수도꼭지를 조금 열어두고 얼지 않게 해야 하는데 나는 물을 그냥 흘리는 게 불편해 늘 수도꼭지를 잠갔고 남편은 열었다. 잠그고 열고를 반복하다 어느 날 수도가 얼어 버렸다. 식수와 바깥 화장실이 없던 우리는 물이 많이 필요했다. 남편은 망연자실했다. 여러 시간 눈을 파헤쳐 개울로 내려가는 계단을 만들었다. 그래도 바닥은 얼어붙어 미끄러웠다. 물 긷는 일이 허리디스크가 다 낫지 않았던 내겐 힘들었다. 그래서 아주 조금씩 떠왔다. 남편이 물 긷는 일도 조마조마하게 지켜봤다. 하루 최소사용량 물 70리터 채워 놓기, 마당 쓸기, 개울로 내려가는 계단 관리하기. 그 겨울 매일의 숙제였다. 그 때 읽고 있던 지허스님의 토굴수행기 《사벽의 대화》가 큰 힘이 되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지금 여기’에 살고자 했지만 봄은 참 먼 곳에 있었고 나는 지쳐가고 있었다.

그즈음 그분이 전화로 점심 먹으러 오라고 불렀다. 아침부터 쏟아지던 눈을 뚫고 도착한 그 댁에 차려진 밥상. 지금도 생생하다. 구수한 청국장에 고추부각튀김, 산나물 장아찌와 부인이 직접 담근 명란젓, 아삭한 통무김치…. 매일 긴장의 연속이었고 식생활은 거의 연명 수준이던 내가 무장 해제되는 순간이었다. “야 임마 너 한 달은 굶은 사람 같다. 좀 천천히 먹어.” 말하는 그에게 나는 말 시키지 말라고 손을 내저으며 허겁지겁 밥을 두 공기나 먹었다. 그 밥은 내 육신과 정신의 허기까지 다 메워주는 것 같았다.

퍼붓는 눈이 빠르게 쌓이고 있어서 가지고 간 술은 한 잔도 못 마시고 급하게 일어서야 했다. 눈발이 퍼붓고 있었지만 밥의 온기가 가득했던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오지 않을 것 같던 봄이 왔다. 산골에서 한 해를 살아낸 무렵 그분이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아이처럼 엉엉 목 놓아 울었다. 그 분은 평소 즐겨가시던 계곡 작은 나무 아래 한 줌 재로 안장되었다. “이제 산이 되고 나무가 되셨을 선생님 편안하신지요? 그때 먹었던 따뜻한 밥이 제게 큰 힘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