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웃습니다
당근 밭도 그다지 사정이 좋지 않았다. 넓은 밭에 언뜻 보면 코스모스 잎과도 비슷한 당근 잎들이 초록물결처럼 하늘거리는 게 참 예뻐 보였다. 그러나 잘 컸는지 확인할 요량으로 쑥 당겨보면 뿌리가 물러서 줄기만 당겨올라오는 일이 적지 않다. 이 역시 장마 탓이다. 장마에 연이은 폭염 때문에 자리는 것도 더디다. “제주와 여주에서 공급하던 당근이 출하가 끝나 이제 이 지역에서 얼른 뽑아서 조합원들에게 공급해야 하는데, 덜 자라고 맛도 덜 들어서 8월 말이나 돼야 수확이 가능할 것 같네요.” 장성봉 생산자의 푸념 속에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38선 너머에서 나는 귀한 한살림 먹을거리
양구연합회가 있는 강원도 양구 해안면으로 가려면 38선을 넘어야 한다. 민통선 북방, 출입증이 있어야만 드나드는 게 가능했던 마을이었는데 20년 전 비로소 민간인 출입통제가 풀렸다고 한다. 산업시설이 없어서 맑고 깨끗하며, 높고 낮은 산들에 둘러싸인 분지 지역이다. 을지전망대에서 내려다보면 움푹 들어간 곳에 마을들이 여기저기 자리 잡고 있어 특이한 모습이다. 6·25 당시 이곳을 본 미군들이 ‘펀치볼’같이 생겼다 해서 펀치볼이라는 별칭으로도 알려져 있다.
한살림 양구연합회는 2012년 홍천연합회로부터 분화되어 꾸려졌다. 한살림에 잡곡을 내기 시작하면서 홍천연합회와 인연을 맺기 시작했는데 홍천연합회에서 내는 잡곡의 80% 가량이 양구에서 생산된 것이라고 한다. 한살림과 만나기 전에는 일반 업자들에게 물품만 내고 돈을 떼이는 일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양구에서는 20여 가구의 생산자들이 양상추, 양배추, 브로콜리, 수박, 오이, 미니파프리카, 무, 당근, 감자, 잡곡, 쌀 등 정성껏 기른 것들을 조금씩 한살림에 내고 있다.
긴 장마 폭염에 몸살 앓은 여름 채소 산지
바람도 숨을 죽이는 한여름에는 밥상에 올릴 채소들도 참 귀하다. 연중 내내 조합원들에게 안정적인 공급을 하기 위해 한살림의 생산지는 제주에서부터 강원도까지 고르게 자리 잡고 있지만, 해가 갈수록 점점 유난스러워지고 있는 무더위 때문에 다른 지역 여름 채소류 생산이 여의치 않아지면서 한여름에도 비교적 서늘한 양구, 홍천 지역에서 나는 채소들이 그 공백을 메우고 있다.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올해는 계속 쏟아진 비, 연이은 폭염 때문에 이 지역 채소 생산은 많은 피해를 입었다.홍천연합회도 비 피해가 심각했다. 물에 잠겼던 경지의 작물들이 그대로 말라 죽어버린 경우가 허다하다. 제대로 영글지도 못하고 말라죽은 단호박, 녹아버린 열무, 병에 걸린 고추, 누렇게 끝이 타들어간 중파…. 그래도 중파를 살펴보려고 애를 쓰는 이봉연 생산자는 “제가 이렇게 농사짓는 솜씨가 부족하네요.” 하며 씁쓸하게 웃는다. 하늘이라도 원망하고 싶어지는 광경을 눈앞에 두고 하는 이 말에 가슴이 여간 아프지 않았다.
소비자 조합원이기도 한 나는 간혹 여름채소 품질이 기대에 못 미친다고 타박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여름 폭염을 뚫고 길러낸 여름 채소들이 조합원들께 도달하기까지도 수많은 난관을 넘어서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을 견뎌낸 채소가 우리 밥상에 오르는 일.
새삼 밥 한 그릇에 온 우주가 들어있다는 말이 더욱 절절하게 다가온다.
생산자는 책임생산
소비자는 책임소비
최근에는 사정이 좀 나아졌지만, 장마철에 한살림 채소를 이용해본 조합원은 이것들이 얼마나 귀한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먹고 싶은 채소를 사려고 장바구니를 들고 동네 한살림 매장을 찾을 때면 눈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여야 할 때도 있다. 채소가 귀할 때는 이러다가도, 공급이 원활해지고 시중 가격이 낮아지면 은근히 그쪽으로 눈길이 가기도 한다. 하지만 앞으로는 장맛비와 폭염, 해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예측하기 힘든 날씨를 이겨내고 ‘책임 생산’을 완수하고 있는 생산자분들의 얼굴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시중 가격이 폭등한다고 생산자들이 생산과 공급 약속을 저버리지 않는 것처럼, 가을이 다가오면서 밥상에 오를 채소들이 풍성해지면서 고개를 드는 셈 빠른 마음을 스스로 경계해야겠다. 나는 도시에서 장바구니로 함께 농사를 짓고 있잖은가. 책임 소비를 통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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