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김장 준비를 마쳤다. 마늘과 파, 갓, 무는 과수원에 딸린 텃밭에서 나왔고 고추는 이웃들이 조금씩 나누어준 것만 해도 남을 정도였다. 새우젓과 양파 정도만 오일장에서 사왔다. 올해 처음으로 실패한 게 어이없게도 배추다.
해마다 별 신경 쓰지 않아도 실하게 포기를 안던 배추 농사를 초장부터 망쳤던 것이다. 말복 지나 배추 모종을 구해 심어놓고 과수원 일에 매달리느라 눈길을 주지 않았더니 어느 틈에 벌레가 창궐하여 속대만 남기고 모두 뜯어먹은 게 아닌가. 백 포기 넘게 심은 게 겨우 스무 포기 정도 남았을까, 그나마 속이 차지 않아 진즉에 겉절이로, 된장국으로 사라진 바 되었다. 다행히 마을에는 유기농으로 배추농사를 짓는 집이 있어 그 집에서 오십 포기를 사왔다. 그렇지 않아도 싼데 이웃이라고 거의 거저나 다름없이 얻었다.
이렇게 일찍 김장을 하게 된 것은 오직 하나 김치냉장고 덕이다. 예전에는 대설 무렵이나 되어야 김장을 했었다. 기껏해야 땅에 묻거나 광에 보관했으니까 일찍 맛이 들면 이른 봄에 벌써 군내를 풍기게 마련이었다. 뽑아놓은 배추를 짚으로 덮어두고 살얼음이 얼고 눈발이 날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김장을 담갔다. 우리도 서울 사는 아우네 시간에 맞추어 일찌감치 김장을 하게 된 것이었다.
배추를 절이고 양념 준비를 하는데 가만히 보니 이게 보통 화려한 김치가 아니다. 별 특색 없고 심심한 충청도 김치라 비린 것이라곤 겨우 새우젓 한 가지 들어가지만 고춧가루며 마늘을 버무리는 양이 엄청나다. 보통 배춧잎 사이마다 양념을 넣는 것을 당연한 듯이 여기나 수십 년 전만 해도 보통 서민들 집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우선 요즘처럼 양념류 농산물 값이 싸지 않았다. 믿기 어렵겠지만 마늘과 고추는 삼십 오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 가격 차이가 없다. 라면이 오십 원에서 열 배 이상 오른 세월 동안 말이다. 직접 농사를 짓던 우리 집에서도 지금 우리가 흔히 보는 포기김치는 손님이나 특별한 날을 위해 대여섯 포기를 따로 담그는 게 다였다. 식구들이 겨우내 먹는 김치는 절인 배추를 숭덩숭덩 썬 다음 옅은 양념 물에 대충 버무리는 거였다. 간신히 백김치를 면한 것을 항아리에 넣었다가 아침마다 한 보시기씩 꺼내오는 것을 김치 아닌 ‘짠지’라고 불렀다. 지금 생각해도 그 때의 김장은 김치보다 짠지라는 호칭이 더 어울린다.
추운 겨울날, 절인 배추를 씻을 물은 어디에 있었던가. 집집마다 리어카에 싣고 그도 없으면 지게에 지고 큰들 논배미 지나 앞개울로 갔다. 남자 어른들이 그런 일을 도와주는 것은 남우세스러운 시절이었으므로 리어카를 끌고 가는 건 내 몫이었다. 그리고 배추를 씻는 시간은 어린 시절에 가장 길고도 괴로운 순간이었다. 월악산에서 흘러내린 차디차고 맑은 물에 장화도 장갑도 없이 들어간 어머니는 빨갛게 얼었다. 가끔씩 물에서 나와 개울가에 피워놓은 불에 손을 녹이던 어머니가 ‘손발이 떨어지는 거 같다야’ 하고 웃었지만 나는 자꾸만 울음이 나오려 했다. 그리고 그예 눈물 몇 방울을 떨어뜨리곤 했다. 사
십 년 저쪽 어름, 얼굴에 버짐이 피고 어머니가 장에서 사온 ‘원기소’를 과자처럼 한 움큼씩 씹어 먹던 겨울날이었다.

 

글을 쓴 최용탁 님은 충북 충주의 농촌마을에서 태어나 월악산과 남한강 사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서른 한 살에 고향으로 돌아와 과수원을 하며 아이 셋을 키우는 동안 세상살이의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펴낸 책으로는 소설집 <미궁의 눈>, <사라진 노래>, 장편소설 <즐거운 읍내>, 산문집 <사시사철>, 평전 <계훈제> 등이 있습니다.

 

Posted by 한살림연합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