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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살림‧농업살림‧생명살림/살림의 마음

하나 됨, 기억보다 더 깊은



주요섭


“아이의 휴대전화 번호를 없애지 못했습니다. 아이한테 가끔가다 카카오톡 이런데다 편지를 씁니다. ‘잘 지내고 있지’ 이렇게… 휴대전화는 항상 충전기에 꽂힌 채 24시간 켜있습니다. 그러면 중학교 때 친구들이 딸에게 카카오톡을 보내요. 어떨 때는 밤에도 계속 울려요. 카톡,카톡 그러면서… 보니까 중학교 때 단짝인 아이가 ‘보고 싶다’, ‘사랑한다’고 계속 쓰고 있더군요.”

휴대전화 소리에 잠을 깨는 세월호 아빠의 이야기가 가슴을 때립니다. 유족들 대부분은 아직 아이들의 사망신고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직 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억울하고, 분하고, 한스럽고, 안타깝고, 또 너무도 사랑하여 아직 아이의 자취를 지울 수가 없습니다.

아닙니다. 보내지 않은 것이 아니라,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련이 남아서가 아닙니다. 하늘을 거스른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살릴 수 있는 영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영혼을 향해 정치논리로 찬반을 논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잊지 말자는 것이 아닙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알아차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공포와 절망에 떨던 아이들이 바로 나였다는 것을.

아프지 않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발가락 끝에 가시가 박혔을 때, 우리는 비로소 발가락의 존재를 알아차립니다. 복통으로 내장이 뒤틀릴 때, 우리는 비로소 위장과 하나였음을 자각합니다. 나의 몸이지만, 아프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참혹한 고통이 있을 때에만 ‘숨겨진 하나 됨’이라는 잊힌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한국사회가 하나의 커다란 생명체라면, 우리 사회 어느 구석에서 누군가 비명을 지르며 죽어갈 때 우리는 비로소 사회적 몸의 존재를 알아차립니다. 세월호 참사가 없었다면 우리는 단원고 아이들을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세월호라는 배의 존재도, 선장과 선원도, 해양수산부와 해경의 실체도 인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세월호의 아픔과 죽음이 우리가 하나였음을 일깨웠습니다.

유럽의 어느 공동체 이론가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타자가 혼자 죽어가지 않도록 타자를 위로한다.” 그렇습니다. 돈도 권력도 언론도 외면하는 이른 새벽 노숙자의 죽음과 깊은 산 속 요양병원의 죽음에 연민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 진정한 공동체입니다. 죽음의 공동체야말로 진정한 공동체인지도 모릅니다. 타자라고 생각되었던 그는 타자가 아니었습니다.

무위당 장일순의 깨달음이 생각납니다.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곧 나였다는 것을.” 세월호의 공포, 세월호의 눈물, 세월호의 죽음 앞에서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생명은 하나라는 것을.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습니다. 이미 우리의 몸과 마음엔 각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기억으로 떠올리지 않아도 이미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아픔 때문에 되살아난 것뿐입니다. 오늘 아침 내 안의 휴대전화 울림이 보이지 않는 하나됨을 일깨웁니다.

글을 쓴 주요섭님은 한살림전북과 모심과살림연구소에서 생명사상과 협동운동에 대한 연구와 교류 활동을 펴왔습니다. 현재는 한살림연수원에서 ‘한살림사람’을 기르는 일을 돕고 있습니다